<신체포기각서 / 성명 / 주민등록번호 / 본인은 00으로부터 00원을 대출받았으나 약속한 기한까지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였기에 계약에 따라 담보물로 설정된 주요 장기를 비롯한 신체 전부에 대한 권리를 사업자 00에게 양도하며 이를 확인하여 분란의 여지를 없애고자 이 각서를 작성합니다>
드라마 소품으로도 나왔던 신체포기각서의 표본이다. 주로 젊은 여성에게 돈을 빌려주고 돈 갚을 능력 없으니 몸으로 때우려며 온갖 나쁜 짓을 하는 악덕 대부업자의 얘기에 단골로 등장하는데 며칠 전에도 이를 빌미로 성폭행하고 빌려준 돈의 수십 배를 뜯은 대부업자가 중형을 받았다는 기사가 나왔다. 신체포기각서라는 게 당연히 불법인데 왜 어리석게 이를 근거로 협박과 폭행을 당하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글쎄, 이런 각서를 쓴 당사자들의 수만 가지 사연이 이런 무시무시한 각서보다 더 절박했을 수 있고, 이 정도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설마'가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을테고... 신체포기각서의 고전이랄 수 있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돈을 못 갚으면 살 1파운드를 주겠다>는 각서를 쓰고 돈을 빌릴 때 돈을 못 갚을 상황을 상상도 하지 않은 것처럼.
불법 대부업자가 젊은 여성을 착취하는 건 중국도 문제인 모양이다. 중국에도 신체포기각서 못지않은 '뤄다이'라는 것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裸 벌거벗을 라' '貸 빌릴 대'를 쓰는 뤄다이 裸貸 는 돈을 빌린 여성이 나체로 자신의 신분증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서서 신분을 밝히는 것이다. 사채업자들은 이를 이용,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영상이나 사진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하고 실제 사진을 유포하거나 불법 나체 채팅, 성매매로 돈을 갚으라고 한다. 주로 지방 출신 여대생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불법 대출인데 대부업자는 처음부터 돈을 빌린 여성이 갚을 능력이 없으면 더 좋아한다. 그녀의 나체 영상과 신상을 손에 쥔 대부업자는 협박에 겁먹은 무지한 학생을 멋대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이달에 부모에게까지 나체 사진이 전송되는 고통에 시달리던 여대생이 자살했다. 연이어 뤄다이의 갖가지 피해 사례가 드러났다. 이를 계기로 뤄다이를 심각한 사회문제로 보고 철저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그런데 뤄다이 피해자는 동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많았다. 변제 능력을 생각지 않고 쉽게 돈을 빌릴 방법을 택했고, 스스로 나체를 드러내 스스로 존엄성을 깎아내렸고, 피해자의 상당수가 생활고 등 긴급한 대출이 아니라 휴대전화, 의류, 가방 등 허영심 만족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저당 잡힌 사람이란 비난이 드셌다. 물론 피해자의 행태에 문제가 있다해도 이렇게 불법으로 악용당해 마땅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채 피해자에 비해 뤄다이 피해자에 대한 동정론은 많이 눅졌다.
신체포기각서와 뤄다이를 얘기한 것은 딴 데 있지 않다. 피해자의 책임론이나 불법 대부업자의 문제점을 장광설로 펼 맘은 없다. 단지, 신체포기각서와 뤄다이를 보면 한국이나 중국이나 경제적 약자인 젊은 청춘과 서민들에게 은행 문턱은 참 높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는 것이다.
헤럴드 김 종백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
464 | Naeronambul | hherald | 2021.04.12 |
463 | 코로나가 깎아 먹은 기대수명 | hherald | 2020.12.14 |
462 | 코로나 19 백신과 '죄수의 딜레마 | hherald | 2020.12.07 |
461 | 선거권은 '권리'다, 당신의 '권리'다 | hherald | 2020.11.02 |
460 | 코로나가 만든 유럽의 야간 통행 금지 | hherald | 2020.10.26 |
459 | 록다운 Lockdown | hherald | 2020.10.12 |
458 | 코로나 시대의 노숙인 소묘 | hherald | 2020.10.05 |
457 | 아미시 AMISH 공동체, 그들의 문화? | hherald | 2020.09.28 |
456 | 인도의 하위계급이 불교로 개종하는 까닭 | hherald | 2020.09.21 |
455 | 독거노인의 죽음과 한인 양로원 | hherald | 2020.09.14 |
454 | 백서 白書 | hherald | 2020.09.07 |
453 | 헤럴드단상으로 보는 지난해 추석 풍경 | hherald | 2020.08.24 |
452 | 한인헤럴드의 행복한 책임 | hherald | 2020.08.11 |
451 | 외식비의 반을 '영국 정부가 쏜다'는데 | hherald | 2020.07.27 |
450 | 뉴몰든 코리아타운의 노노케어 | hherald | 2020.07.13 |
449 | 50년 전 주영대사관의 어느 영사를 회상하며 | hherald | 2020.06.29 |
448 | 짓밟힌 노예무역상의 동상, 다시 드러난 불편한 진실 | hherald | 2020.06.15 |
447 | 코로나바이러스 음모론 | hherald | 2020.04.06 |
446 | 한인사회에 피는 온정 "나는 괜찮아요, 당신 먼저" | hherald | 2020.03.23 |
445 | 인포데믹 Infodemeic | hherald | 2020.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