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평화의 소녀상을 위안부상으로 부르기로 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소녀상이라 부르면 실제 애꿎은 소녀가 위안부로 끌려가 능욕당한 의미가 짙기 때문에 자기 잘못을 희석하려고 명칭을 바꾼 것이다. 위안부 평균 연령이 20세가 넘어 소녀로 부르기 부적절하다는 변명도 했지만, 일본군 위안부 가운데 미성년자가 다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인데 무슨 궁색한 핑계를...
소녀상의 정식 명칭은 평화의 소녀상이다. 이 상을 만든 이들은 줄곧 소녀상이 일본에 대한 증오를 키우려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염원했던 할머니들을 위한 ‘평화의 비’임을 강조해 왔다.
또 하나의 소녀상이 있다. '또 하나의 소녀상'이라고 한 것은 '또 하나의 가족'을 사칭하는 삼성 사옥 앞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바로 백혈병으로 숨진 피해자를 표현한 '반도체 소녀상'이다. 삼성 반도체 피해자 지원단체인 ‘반올림’이 서울 삼성그룹 사옥 앞에 ‘반도체 소녀상’을 설치했다. 조각상을 만든 작가는 "하얀 방진복을 입은 반도체 노동자가 팔짱을 끼고 삼성을 향해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조각상의 모습처럼 직업병피해자들이 잘 싸워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일본대사관 앞의 ‘평화의 소녀상’과 삼성 사옥 앞의 '반도체 소녀상'. 둘 다 우리 역사의, 우리 시대의 가장 아프고 약한 이를 상징하지 않을까.
그럼 두 소녀상이 바라보는 대상인 일본과 삼성은 어떤가. 1992년부터 있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는 오직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원한다. 삼성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며 농성하는 피해자들도 '진정성 있는 사과'를 원한다. 이런 사과를 외면하기는 일본이나 삼성이나 매한가지다.
피해자를 대하는 자세도 닮았다. 돈보다 진심 어린 사과와 재발 방지를 원하는 피해자들을 돈만 밝히는 사람들로 치부하고, 어린 소녀를 위안부로 끌고 가고선 자발적 매춘부였다고 몰고 가고, 삼성반도체와 LCD에서 일하던 노동자 수백 명이 희귀난치성 질환에 걸렸다고 제보됐는데 이를 개인적인 질병으로 몰아가는 것도 닮았다.
평화의 소녀상이나 반도체 소녀상을 보는 것이 불편한 이들은 이런 활동을 하는 피해자들을 향해 돈 욕심에 저런다고들 폄훼한다. '돈만 밝히는 파렴치한'이라는 말은 이 피해자들이 아니라 가해자를 향해야 할 말이다. 생명보다 돈이 더 중하고 욕심이 팽배한 이들이 귀한 생명을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내보내지 않았나.
이제 다 드러난 얘기지만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영상에 나온 1인당 화대는 500만 원,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주인공으로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숨진 황유미 양에게 목숨 값으로 내밀었던 돈도 500만 원. 또 하나의 소녀상을 보면서 삼성이 말하는 '또 하나의 가족'은 자기 제품을 선뜻 살 수 있는 소위 구매력 있는 고객에 한정된 말이 아닐까 실감한다. 삼성이 그냥 바뀔 리는 요원하지만 그걸 바꿔야 우리가 안전하다는 걸 되새겨 주는 '또 하나의 소녀상'이다.
헤럴드 김 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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