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헤럴드 단상

콥트교인을위한조가(弔歌)

hherald 2012.03.19 21:18 조회 수 : 2568

이집트 콥트 기독교의 수장인 교황 셰누다 3세가 몇일전 서거했다. 셰누다 3세 교황은 1971년 즉위해 30년 넘게 콥트교를 이끌어왔다. 이슬람국가인 이집트에서 그리스도교인 곱트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차별과 박해와 유혹의 삶이며, 생명의 위협까지 갖는 삶인데 곱트교의 역사 중에서도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한 639년 이후 가장 파란 많은 눈물의 세월을 고스란히 안고가는 교황이 됐다.   

편의상 이집트 인구의 10% 정도를 곱트교인으로 본다. 나머지는 모두 이슬람이다. 이집트 헌법 제1조는 ‘이슬람은 국교’. 이집트에서 기독교 신자가 무슬림에게 개종을 권유하려면 법정에서 무기 징역이나 사형 선고 받을 것을 각오하고 해야 한다. 기독교로 개종한 무슬림이 있다면 동네를 떠나거나 숨어 살아야 한다. 반면에 무슬림이 기독교 신자를 개종시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에 불평등한 규정이지만 이집트에서는 엄격하게 적용한다. 그런데 셰누다 3세 교황이 즉위한 이듬해인 197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한 젊은 콥트교회 신부가 두 학생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사건이 알려지자 콥트교에 대한 증오가 이집트 곳곳에서 폭발해 수백 명의 콥트교도가 테러로 죽는 참사가 있었다.

'곱트'라는 말은 이집트인을  통칭하는 말이다. 곱트교 복음의 뿌리는 예수의 제자인 마가에서 시작되며 콥트교의 초대교황이기도 하다. 기독교로부터는 이단으로 배척받고, 이슬람으로부터는 핍박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1700년 세월 동안 신앙의 끈을 이어올 만큼 종교적 자부심과 선민의식이 있다. 수도원 제도도 콥트교에서 시작됐다. 곱트교가 이단이라면 물질만능에 젖은 지금 종교의 모습를 따라가지 않아서 이단이라고 해야할 만큼 청렴하고 곧다. 
  
그러나 종교적 자부심과 선민의식만으로 살기에는 이집트의 종교갈등이 녹록치 않았다. 1972년 이후 두 종교 간의 유혈충돌은 수시로 발생했고 그때마다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콥트교였다. 교회에 폭탄이 터지고, 성폭행을 당하고, 불평등 항의 시위대에는 군대가 발포하기까지 했다. 콥트교인이 정부 요직에 나갈 기회는 없고, 제대로된 취업 기회도 없다. 이집트에서는 쓰레리 처리장 근처에 사는 사람은 대부분 기독교인이다. 이집트 정부에서 난지도 사업 같은 것을 곱트인에게 권해왔고 일거리가 없는 그들은 그런 일이라도 해야 했다. 이집트에서 무슬림으로 개종하지 않는한 이교도간의 결혼은 불법이다. 그러다보니 콥트교도 남성과 무슬림 여성의 사랑이 발각돼 두 집안간의 싸움이 종교 갈등으로 번져 수십 명의 죽고, 교회가 불타는 이집트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종종 등장한다.

셰누다 3세 교황은 이집트에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이 가장 심한 시기에 곱트교를 이끌었다. 그는 곱트교의 크리스마스가 공휴일로 지정된 해 첫 자정미사에서 <코란에도 성모 마리아가 여성의 귀감으로 언급돼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이슬람과 기독교의 조화를 갈망했다. 그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갈등이 아니라 모스크의 첨탑과 기독교의 십자가가 공존하는 세상을 꿈꿨을 것이다. 그 꿈이 어디 성직자 한사람의 꿈이기만 할까.


헤럴드 김종백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