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어느 라면(라멘) 체인점이 대학생 중 장학생을 뽑아 1년 내내 라면을 무료로 주는 '라면 장학생' 제도를 만들어 화제다. 장학생이지만 돈을 주지 않고 라면만 준다. 일 년 동안 매일 주니 365그릇. 이를 만든 라면 체인점은 어느 지방의 유명한 체인점인데 수도 도쿄에 진출하면서 첫 매장을 낸 곳이 마침 와세다 대학 근처라 대학생 대상 이벤트를 만든 것이다. 장학생은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모집하고 대학생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체인점 대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이 많아지고 있어 라면으로 학생을 지원하고 싶다."라는데 결국 4명만 선발한다고, 글쎄... 학생을 지원하고 싶은 건지 이런 이벤트로 학생들의 관심을 오히려 지원받고 싶은 건지.
'라면 장학생'이라는 말에는 우리나라 체육 스타들이 떠오르고 그들을 둘러싼 짠한 사연과 그들을 우려먹던 엘로우 저늘리즘이 떠오른다. 우선, 체조의 양학선 선수. 2012 런던 올림픽 기계체조 남자 도마 결선. 재영 한인들도 숨죽여 봤다.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완벽하게 선보이며 압도적 성적으로 대한민국 체조 역사에 최초로 금메달을 안겼다. 한국처럼 런던 한인촌도 환호를 질렀고 기쁨을 나눴다. 그런데 영웅이 된 그를 추적하는 언론은 그의 가난했던 삶, 그의 부모님이 살던 비닐하우스 집, 그와 어머니의 전화 통화에서 나온 라면 이름 등만 부각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 오면 뭘 해줄까, 너구리라면? 아니 칠면조 요리 해 줄게>라는 내용으로 말했는데 거두절미하고 '너구리라면'만 주목되고 남았다. 아, 가난해서 라면만 먹은 선수. 소위 라면 장학생이다. 해당 라면 업체는 얼마나 좋았을까. 당장 양학선 선수가 평생 먹을 라면을 후원하겠다고 홍보 마케팅을 했다. 실제로 라면 100박스를 전달하고 수만 박스 어치 이상의 홍보 효과를 빼먹었다.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뻥튀기 '라면 장학생'의 전설적 희생자는 말 그대로 '라면 소녀'로 우리에게 각인된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 선수다. 물론 실력이 있었지만, 당시 운運도 따라 예상 밖의 성적으로 3관왕이 되자 88올림픽을 앞두고 영웅이 필요했던 때에 등장한 그를 언론이 더 과장했다. 임춘애는 하지도 않은 말, 라면만 먹고 뛰었다, 우유를 먹고 뛰는 애들이 부러웠다, 등으로 가난을 극복한 스토리로 만들었다. 육상부에 지원이 부족해서 '간식으로 라면을 먹는다'는 얘기를 들은 기자가 자기 말로는 '후원을 더 받게 해주려는 마음'에 좀 과장해서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황색 저널리즘을 만들었다. 기사가 나간 후 상당한 후원을 받은 건 사실이나 이 후원이 임춘애에게는 족쇄가 됐다. 육상은 한국 기록이 아시아 기록에도 못 미치는데 더욱이 세계 기록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임춘애는 88올림픽 예선에서 탈락했다. 부진했기도 하나 세계 기록과 비교해 너무 딸려 출전권도 못 얻었다. 그러나 대중은 임춘애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아시안 게임에서 메달 따고, 영웅 대접받고, 포상금 쌓이고, 지원금 쏟아지니 배가 불러 제대로 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비난이었다. '라면 장학생'이 헝그리정신을 잃었다는 비난이었다. 육상 기록은 헝그리정신만으로 될 일이 아닌데도 '라면 장학생'의 멍에는 그녀에게 오랫동안 혹독했다.
라면이란 음식은 단순하면서도 거칠다고 할까. 아니 라면이 음식이 되어 나타나는 현장이 대체로 거칠다고 할까. 빵과 우유를 간식으로 못 먹고 라면만 먹고 달려야 하는 현실이 있다면, 기쁘거나 슬픈 날 준비된 음식이 라면이라거나, 땀 흘린 이에게, 허기진 이에게, 거친 환경, 그런 삶의 현장에, 정확히는 한국의 라면이 어울리는 환경이라면... 그런데 이도 모두 옛이야기다. 이제 우리도 '라면 장학생' 제도는 졸업한 지 오래다.
'라면 장학생' 제도를 만든 일본의 라면 체인점이 새로 점포를 여는 도쿄의 와세다 대학 일대가 학생가街이면서 일본 유수의 라면 격전지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홍대 신촌 상권쯤 된다는데 '라면 장학생' 제도를 첫인사의 얼굴 알리기 정도로만 해야지 너무 우려먹으면 글쎄, 일본 라멘은 다를려나.
헤럴드 김 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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