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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무명천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린 분이 있었다. 턱을 평생 하얀 무명천으로 가려서 생긴 별명인데 '진아영'이라는 예쁜 본명이 있었지만 늘 무명천 할머니로 불렸고 제주 4.3 사건의 상징적인 피해자로 자주 언론에 그려졌다. 제주도에서 평범한 삶을 살다가 35살쯤에 4.3 사건 때 토벌대가 쏜 총에 맞아 아래턱을 잃어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음식도 제대로 못 먹는 장애인이 됐다. 잃은 아래턱 자리를 늘 하얀 무명천으로 가리고 평생 약에 의지해 불편한 삶을 살았던 할머니는 2004년 후유증과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젊었을 때는 제주도는 어느 마을이나 비슷한 날 제사를 지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요즘도 제사야 계속 모시겠지. 이는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가 그렇게 많다는 뜻이다. 한마을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가 학살 당했으니 한두 집만 건너면 또는 친척의 친척이면 대부분 희생자가 있다는 것이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한 어린이가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치이는 사건에서 시작된다. 군중이 경찰을 쫓아가 항의했는데 경찰은 이를 습격으로 알고 발포해 민간인이 죽고 다친다. 제주도민이 정부에 사과를 요구했지만 듣지 않았고 제주도는 대규모 민관합동 파업이 일어났다. 파업에 경찰도 참가했는데 이승만 정권은 파업한 경찰들을 해임하고 그 자리를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채웠다. 서북청년단이란 자들이 북한의 공산주의가 싫어서 온 자유주의자로 포장된 진짜 극우 세력으로 정치 깡패들이었다. 북한 조폭 출신도 많아 잔인했고 북에서 쫓겨온 분풀이를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양민에게 가하는 양아치 기질도 다분했다. 제주도 경찰로 들어온 이들의 횡포가 심해 고문치사 사건이 다반사요, 경찰이라기보다는 조폭 처럼 설치고 다녀 민심이 극도로 나빴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 지부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경찰 가족을 살해한다. 그래서 제주 4.3 사건이다. 공산당에 의한 경찰서 습격이라는 처음 사실은 맞다. 그러나 그 진압과정에 무고한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다. 당시 500여 명에 불과한 남로당원을 잡는데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학살당했다. 제대로 빨갱이 구분도 않았다.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였다. 미친 서북청년단에게 제주도민은 학살, 약탈, 강간, 살인연습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는 지금 명백한 증언자료가 남아있다. 제주 4.3 사건은 제주도 방언까지 사라지게 했다. 제주도 사람이란 게 문제가 되는 세상이라 학교에서도 의도적으로 방언을 못 쓰게 했다. 쓴다고 좋을 게 없는 세상이었으니까. 

 

 

제주 4.3 사건은 민주화 이후에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사건 55년 만에 국가원수로서 첫 사과를 했다. 그리고 어제 제69주년 추념식에서 황교안 권한대행은 추도사에서 희생자 및 유족 심사와 결정 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주관광, 제2공항, 안보 등 추념식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 더 많았다. 무명천 할머니가 돌아가신 2004년 9월에 발행한 한인헤럴드를 다시 보니 할머니의 생전 사진이 1면에 있고 <4·3 희생자에 대한 배상, 명예회복, 유해발굴> 등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억울한 원혼의 신원 伸寃 은 그제나 이제나 뒷전인데.

 

 

헤럴드 김 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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