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이 만든 옷을 입자. 우선 남자 두루마기, 여자 치마는 조선인 생산품이나 가공품으로 입자. 소금, 설탕, 과일, 청량음료를 제외하고는 전부 조선인이 생산하거나 만든 것을 먹자.>
1923년 조만식 선생 등이 전개한 '물산장려운동'의 처음 실행 조건들이다. 물산장려운동은 일제의 경제적 착취에 대항해 민족 경제를 살리자는 운동이었다. 이때 조선물산장려회가 발행한 전단은 더 구구절절.
<보아라, 우리의 먹고 입고 쓰는 것이 거의 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제일 세상에 무섭고 위태한 일인 줄은 오늘에야 우리가 깨달았다.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형제자매들아, 우리가 서로 붙잡고, 서로 의지하여 살고서 볼 일이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쓰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당시 경성방직주식회사는 동아일보에 삼성표 광목, 삼각산표 광목을 광고하면서 시류에 편승해 당당히 애국심 마케팅을 한다. 광고 문구가 이랬다. <조선을 사랑하시는 동포는 옷감부터 조선산을 씁시다. 처음으로 조선 사람의 작용과 기술로 된 광목>.
1960년 4·19 혁명 직후, 대학생을 중심으로 '신생활운동'이라는 국민계몽운동이 전국적으로 불었다. 자유당 시대의 부패와 부정은 일부 정치인의 도덕적 타락뿐 아니라 대다수 국민들의 정신자세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하고 낡고 오래되고 잘못된 것들을 발본색원하자는 의지로 시작됐다. 국산품 애용을 골자로 양담배 소각, 사치추방캠페인 등을 전개했다. 국민계몽대 같은 시민단체는 '망국 사치품, 건국 국산품'이라 쓴 플래카드를 들고 극장이나 다방을 돌았다.
5·16 군사정권은 국산품 애용 운동을 전개한 정도가 아니라 힘으로 밀어붙였다고 해야 한다. 양담배 피는 사람을 공산당 못지않게 나쁘게 보는 사회 분위기였다. 양담배 피는 사람을 적발하는 것이 경찰이 할 일 중 하나였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교실에도, 동네 전봇대에도 '국산품 애용'이 붙어 있었다. 수업 중에 일본산 연필을 쓰는 학생을 찾아내는 것이 교사가 할 일 중 하나였다.
일본 정부가 대법원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과 관련해 한국에 사실상의 경제 보복 조처(물론 일본 정부가 수출 제한 이유를 언급하지는 않았다)를 취하자 이참에 일본 물건 사지 말자는 운동이 인다. 2019년의 물산장려운동이요, 국산품 애용 운동이다. 일본이 반도체 제조 과정에 필요한 부품 등의 수출을 제한한 것으로 봐 굳이 전문가가 보지 않아도 <한국 경제가 반도체 산업 의존도가 높은 점을 노리고, 한국에 가장 타격이 클 만한 보복 조처를 꺼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 일본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맞불을 놓자, 일본 제품 쓰지 말고 일본 여행 가지 말자,는 운동. 국산품 애용이 몸에 밴 세대는 이런 '애국심 마케팅'에 잘 따른다. 그런데 물산장려운동이든 국산품 애용이든 결국 국내 산업 자본가의 배만 채워주는 결과가 됐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아베가 밉고 일본이 밉다손 외교와 경제를 분리해 계산해야지 한쪽 문제에 어느 한쪽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은 참 어리석은 행동이다.
2019년의 물산장려운동이든 국산품 애용이든 우리는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 국민에게 득이 되는지 따져보는 차가운 머리의 계산법이 나라를 이끄는 이들에게는 있어야 한다는 바램을 덧붙인다.
헤럴드 김 종백
런던 코리아타운의 마지막 신문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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