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2주년 경축식에서 두 개의 감동적인 무대를 봤다. 우선 애국지사 오희옥 할머니가 부른 애국가를 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불린 최초의 애국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에 맞춘 오희옥 지사의 외로운 애국가는 전율이었다. 구순이 넘은 살아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애국가를 들으니 애국가가 그리 절절한 노래였음을 새삼 느꼈다.
이윤옥 시인의 시집 <서간도에 들꽃피다>에는 오희옥 지사를 노래한 시가 있다. <용인 느린재의 명포수 할아버지 의병장으로 나선 길 뒤이어 / 만주벌판을 쩌렁쩌렁 호령하던 장군 아버지 / 그 아버지와 나란히 한 열혈 여자 광복군의 어머니 / 그 어머니의 꽃다운 두 딸 희영 희옥 자매(중략) 열네 살 해맑던 독립소녀 팔순 되어 사는 집 / 수원 대추골 열세 평 복지 아파트 찾아가던 날 (중략) 독립의지 불사르던 / 오씨 집안 3대 만주벌 무용담 자랑도 하련만은 / 손사래 절레절레 치는 수줍은 여든여섯 광복군 소녀 / 그 누구 있어 치열한 3대의 독립운동사를 책으로 쓸까> 2012년에 이 시가 나왔으니 올해 아흔한 살인 오희옥 지사는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언니까지 온 가족 3대가 독립운동의 역사 그 자체다. 열네 살의 소녀가 중국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시작해 지금은 수원 13평 복지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다. 이 사정을 알고나니 광복절에 아흔한 살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부른 애국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전율로 다가왔다.
또 하나는 파락호 김용환을 얘기한 연극이었다. 집 재산을 날린 난봉꾼을 뜻하는 의미의 파락호로 불린 김용환은 노름으로 대대로 내려온 엄청난 집안 재산을 날린 인물로 알려졌지만 후에 노름으로 탕진한 줄 알았던 재산이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김용환은 해방 이듬해에 눈을 감았다. 그의 선행을 아는 이가 숨지기 전에 이 사실을 이제 밝혀도 되지 않느냐고 물으니 ‘선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네, 아무 말도 하지 말게나’ 하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난봉꾼 노름꾼인 줄 알았던 딸의 시각에서 그린 김용환의 연극을 보니 숨어서 실행한 그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또한 전율이었다.
지난 8월 15일 영국의 재영한인회관. 참으로 오랜만에 많은 이가 참석한 광복절 경축식이 열렸다. 지역 국회의원이 참석해 영어로 축사를 하고 총영사가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대독하고 식이 끝나고 모여 앉아 식사를 한 것도 참 오래 전의 일이었다. 한인회가 하나가 아니었거나 한인회를 한다는 이들끼리 소송 걸고 싸울 때는 있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이렇게 모이고 한인회의 이름으로 기념식을 할 수 있는 것이 적어도 과거의 그런 불협화음을 없애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뜻이다.
이날 경축식에는 한인회관을 가득 채운 많은 이가 왔다. 이 또한 오랜만이다. 물론 한국에서야 공휴일이지만 영국에서는 공휴일이 아니라 못 온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광복절도, 하나 된 한인회도 한꺼번에 경축하고자 했는데 시간이 안 돼 못 왔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안 온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주목받지 못 한다고, 내 입김이 통하지 않는다고,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딴지를 걸었으니 통합된 한인회를, 그 한인회가 마련한 이런 경축식을 인정할 수 없다고 안 온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통합의 대의를 잰다면 아직도 광복절이 그냥 공휴일인줄 알고 사는 거랑 뭐가 다를까. 마치 아직도 식민지 시대를 산다고 착각하는 앞잡이가 있는 것처럼 유독 영국의 한인사회만 광복이 더디게 온다.
헤럴드 김 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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