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공포의 외인구단'이란 만화가 인기였다. 내 기억에 남는 페이지는 까치가 엄지로부터 받은 편지들을 들고 절규하는 장면. <엄지는 네게 신이었고, 지금까지 이 편지들은 내게 성경이었다> 그땐 멋있다고 생각했다. 신앙 같은 사랑이 있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지난 주말 광화문에는 미신 迷信 에 빠진 정권 때문에 100만 명의 국민이 모였다. 박근혜와 정치적 견해가 달랐던 이들도 분명 '하야'를 외쳤겠지만 박근혜를 지지하고 믿었던 이들 역시 그 좌절감에 광화문에 모였을 것이고 더 크게 하야를 외쳤을 것이다. 정치인을 대상으로도 신앙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이라면 미신으로 드러난 그 대상의 정체에 더 깊이 절망하고 더 큰소리로 '물러가라'고 했을 것이다.
미신은 흔하고 많다. 가장 많은 것이 자기가 믿지 않으면 씌워 버리는 미신이다. 내가 믿으면 종교가 되지만 내가 믿지 않으니 미신이라는, 우리가 많이 빠져드는 편협한 사고가 만드는 판단의 잘못. 이런 거 정치권에 무지 많다. 2007년 범여권이 미래창조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들자 한나라당은 당시 나경원 대변인이 <신당은 김대중(DJ) 전 대통령만 따라가면 천국 문이 열리는 것으로 착각하는 DJ 미신에 빠져 있다. DJ 신
화는 이제 없고 결국 지옥의 불구덩이로 빠지고 말 것>이라 했다. 이제 미신의 정당이라는 오명을 되돌려 받을 처지에 놓이니 그들의 감회가 궁금하다.
박근혜의 독선이 늘 문제가 된다고 했는데도 그는 독선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뭔가 믿는 게 있으니 독선을 부리는구나, 여러 추측을 낳았다. 아, 믿고 기댄 곳이 미신이었다. 지금까지 미신을 믿고 설친 독선이었단 말인가.
여기서는 우리 전통신앙을 미신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박근혜처럼 '자신이 이해하는 것과 경험한 것, 그리고 최순실의 훈수만이 최선이라 믿는 독선'을 가장 위험한 미신이라고 말하는 게다. 종교와는 물론 다르지. 미신은 자신의 욕심과 목적을 이루려고만 노력한다. 일부의 욕심과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했기에 박근혜 정권이 미신에 빠진 정권이라는 것이다.
미신은 늘 빈다. 나만 부자 되게 해달라, 나는 일찍 죽지 않게 해달라, 내 자식들만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 내 며느리만 아들 낳게 해달라... 미신에 빠진 정권이 어떤 기도를 할까. 아니 어떤 기복 祈福 을 할까. 미신에 빠진 정권이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그릴 수 있을까. 나만 잘사는 것이 훨씬 쉽다는 걸 아는데. 미신에 빠진 정권이 내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도 행복해질 세상을 꿈꿀까. 그러려면 내 아이가 가질 행복의 파이가 작아지는데. 이래서 미신은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것이다.
최순실과 비견되는 제정 러시아의 괴승 怪僧 라스푸틴이 죽은 뒤에도 니콜라이 2세는 끝까지 혁명의 전조를 외면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미신을 믿고 설친 독선의 끝이 우리 눈에는 보이는데 미신을 믿는 이들은 아직도 현실 상황의 위중함을 제대로 알지 못한 느낌이다.
100만 명의 함성이 지척에 들리는 지난 주말의 청와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설마, 아직도 그 어설픈 미신에 기대어 빌면 전 우주가 나서서 도와줄 거란 기적을 기대하는 것은 아닐런지.
헤럴드 김 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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