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은 엄숙하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하나를 더해 5대 비극이라고도 할 만큼 진지하다. 그런데 한국적인 것으로 다시 만들어진 오태석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신이 난다. 웃음이 나온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이 공연을 보고 더 즐거워하는 이들은 현지인이다. 무대도, 의상도, 배우도, 대사도 모두 한국적인데 영국인이 더 즐거워한다. 연극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적인 것에 빠져드는지. 연극평을 쓸 만한 시각이 절대 없는 나로서는 오태석이라는 거장을, 그의 작품을 뭐라 평할 능력도, 자신도 없지만 단지 재미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단순하게 웃고 즐긴 재미가 아닌 또 다른 재미. 그러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듯 이 글에서 소개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없다. 한 번 보시면 안다.
이번에 킹스톤 로즈 극장에 올려진 오태석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미 2006년 바비칸 센터에서 공연된 바 있다. 그때 기사들을 살펴보니 호평이 줄을 잇는다. 이번에 킹스톤 로즈 극장으로 공간을 이동했지만 알다시피 바비칸에 올려지는 작품이 그냥 줄만 선다고 차례가 오는 것이 아니듯 수준은 당연히 검증된 것으로 봐야 한다. 한인들은 가까운 곳에서 수준 높은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꼭 보라고 권한다.
영국의 한인사회에는 늘 우리 문화가 빈곤했다. 문화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문화를 즐길만한 여유가 없었던 사람과 그 시기가 있었고, 문화 즐긴다고 자부하던 이들은 왠지 모를 문화적 사대주의에 빠져 우리 문화를 폄훼했다. 아직도 그런 망상에 빠진 이들이 우리 문화를 폄훼하는 것이 수준 높은 문화적 식견을 가진 것으로 착각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영국의 한인사회는 그런 사람을 왕따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 놓고 잘 나가는 우리 문화를 변방에 갖다 놓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실 식견이 있기는커녕 문화에 대해 무지한 거다.
이번에 오태석의 로미오와 쥴리엣을 데려온 곳은 얼마 전 '난타'를 로즈 극장에 올렸던 <씨애틀 올 포>라는 곳으로 이들은 영국의 한국문화 지킴이들이다. 시쳇말로 '돈 안 되는 장사'를 하는 젊은 친구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현지인과 손잡고 하는 문화 행사나 독단적으로 벌이는 공연 유치 등을 보면 가히 대단하다. 앞서 말한 영국의 한인사회에 우리 문화가 빈곤했다는 말은 이들이 있기 전에 있었던 현상으로 해야 할 것 같다. 그냥 '스스로 좋아서 하겠지'라고 쉽게 말하기가 무색할 만큼 자신의 일에 우직한 이들은 '돈 안 되는 장사'를 이번에도 벌였다. 이 젊은이들이 힘 빠지면 우린 또 빈곤한 우리 문화에 허덕일지도 모른다.
오태석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재미있다. 로미오와 쥴리엣이 죽어서 두 집안이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원한이 깊어져 공멸한다는 오태석식의 결말도 재미있다. 모처럼 뉴몰든에 찾아온 수준 높은 우리 문화. 이를 불러온 젊은이들이 고맙고 대단하다.
그래서 한 번 더 권한다. 꼭 보세요. 오태석의 로미오와 줄리엣
헤럴드 김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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