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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삼전도비(三田渡碑)의 진실

hherald 2010.07.17 19:28 조회 수 : 13938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조선시대 수난의 역사를 상징하는 치욕스런 유물로 애물단지 취급을 받던 문화재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가 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행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삼전도비는 청나라를 오랑캐 국가라고 경멸했던 인조가 삼전도 수항단에서 청태종에게 3번의 절을 하면서 절을 할 때마다 머리를 3번 조아리며 항복의 예를 표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안은 '삼전도의 굴욕'이 있은 자리에 세워진 청나라의 전승비요,  청태종 칭송비다. 그래서  비를 만들 당시의 이름도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였다. 삼전도비는 이처럼 치욕스런 유물인 만큼 수난의 세월을 보냈다.

 

원래 항복을 했던 곳에 세워졌는데 고종황제가 1895년 한강에 매립하라고 명령했고 일제가 그것을 다시 꺼내 세웠다. 광복이 되자 다시 매장했는데 1963년 홍수 때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정부가 문화재로 지정하자 각 지방단체는 서로 싫다고 민원을 올렸다. 문화재 같지 않은 문화재가 오히려 주민생활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2006년 누군가가 비에 붉은 페인트로 '철거 370'이라는 낙서를 하는 일까지 생겼다. 낙서를 한 사람은 "정치인들이 나라를 잘못 이끌면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게 된다는 점을 경고하기 위해서" 삼전도비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또한 '370'은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 꿇은 지 370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수난의 역사를 상징하듯 비(碑) 자체도 이처럼 수난의 세월을 보냈다.

 

삼전도비는 청나라가 조선에 요구하여 인조 17년 1639년에 세워졌다고 흔히 알고 있으며 역사책에도 그렇게 적혀 있고 지금도 그대로다. 그러나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강화조약에는 공덕비를 세우라는 조항이 없다. 인조와 그를 둘러싼 군사집단이 청나라의 비위를 맞추려고 알아서 헌납한 것이다.

 

인조는 인조반정이라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했다. 인조반정은 당시 변하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명분에 빠진 이들이 일으킨 군사쿠데타다.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군부에 끌려가던 인조는 '청태종의 공덕비를 만들자'는 군사집단의 얕은수를 허락했다. 삼전도비는 인조와 능력 없는 군부가 알아서 만든 것이어서 더욱 부끄러운 유물이다.

인조는 삼전도비를 청나라의 입맛에 맞게 하려고 당대의 문장가들을 총동원해 글을 올리게 했다.

 

그런데 누가 이런 글을 쓰고 후대에 남기려 할까. 모두가 발을 빼니까 인조는 문장가 중 가장 어렸던 이경석에게 <나라의 존망이 비문에 달렸으니 문자로 청나라의 마음을 달래 사태가 심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고 한다. 청나라는 비를 세우라 한 적이 없는데 조선이 비를 세우겠다고 제안하니까 청나라가 비를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간섭한 것이다.

 

애물단지였던 삼전도비가 원래 자리인 서울 석촌호수에 준공됐다. 치욕의 역사도 후손에게는 국력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좋은 교육이 된다. 장기적인 국가방위 계획 없이 기득권만 생각했던 당시 정치집단과 그에 맞장구친 왕의 합작품인 삼전도비는 오늘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슬픈 교훈이다.

 

헤럴드  김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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