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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서울 노량진 사육신공원에 건립된 '단종충신역사관'이 문을 연 지 20일 만에 폐쇄됐다. 사육신 후손들의 반발 때문이다. 이름을 '사육신역사관'으로 바꾸라고 주장하고, 일곱 번째 사육신으로 불리는 김문기를 사육신에 넣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문중 후손 간의 마찰이 일기 때문이다.

사육신(死六臣). 수양대군이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뒤 1455년에 조카 단종을 끌어내리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다 발각돼 죽은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유성원ㆍ하위지ㆍ유응부 등 여섯 신하를 지칭한다. 사육신이란 말은 당시 수양대군의 새 정권이 싫어 떠난 남효온이 <육신전>이란 책에 처음 사용했다. 그런데 단종복위사건으로 죽은 사람이 70여 명이 넘는데, 남효온이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여섯 신하를 중심으로 쓰다 보니 그들이 이 사건의 전부인 양 후대에 잘못 알려진 바도 있다. 남효온 자신도 김시습, 원호, 조맹전, 조려, 성담수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리며 큰 역할을 했다.

지금 사육신묘에 7개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 것도 사육신의 숫자에 매이지 말아야 할 점이다. 왜 일곱일까. 당시 역적으로 처형된 그들의 시신을 어느 스님이 밤에 몰래 가서 일부를 대충 추려 한강을 건넜다. 한양이 잘 보이는 노량진 강변에 가매장했는데 그때 성승, 유응부,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 다섯 분이 묻혔다. 임진왜란 때 성승의 묘가 사라져 4개의 묘만 남았는데 여전히 사육신묘로 불렸다. 서울시가 1978년 사육신묘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하위지ㆍ유성원ㆍ김문기의 가묘를 새로 만들면서 결국 사육신묘에는 일곱 분의 묘가 있게 된 것이다.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은 유응부와 함께 수양대군을 살해하는 임무를 맡았던 단종 복위 운동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었지만 남효온의 <육신전>에 이름이 없고, 무덤이 유실돼 사육신이 아닌 것으로 됐다. 지금 사육신이 모셔진 의절사에는 그의 위패도 없다.

사지가 찢기는 참형을 당한 김문기 당시 공조판서도 사육신이다 아니다의 공방으로 지금 사육신묘에 누워서도 편치 않다. 김문기의 후손인 김녕 김씨들이 1970년대 "조선왕조실록에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단종 복위운동을 벌인 것으로 나온다"고 주장해 사육신묘에 가묘가 추가됐지만, 사육신수호회 는 "1977년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조상인 김문기를 사육신에 억지로 넣은 것"이라고 반발해 논란을 낳았다. 김문기 후손이 사육신묘에서 제사 지내려는 것을 순천박씨 박팽년의 후손과 창녕성씨 성삼문의 후손이 새벽부터 막아 몸싸움을 하기도 했다. ‘모반을 인정하면 목숨만은 살려준다’는 회유와 고문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던 역사적 사실과 김문기의 충절보다 사육신이라는 '여섯'의 숫자에 드느냐 않느냐에 더 집착하는 후손의 행태가 어떻게 느껴질까.

'단종충신역사관'이 '사육신역사관'이 아니란 이유로 사육신 후손의 반발로 문을 닫는 것은 사육신의 충절만 추앙받아야 한다는 좁은 소견으로 보일 우려가 있다. 사육신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단종의 또 다른 충신의 충절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충신의 후손다운 태도가 아닐까.

헤럴드 김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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