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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외교행낭은 죄가 없다

hherald 2012.10.15 18:27 조회 수 : 7851




지난 5일 외교통상부 국정감사에서 민주통합당 심재권 의원이 "한국 외교관이 외교행낭을 이용해 거액의 달러를 밀반입한 사실이 있다."고 했다. 심 의원은 달러를 보낸 수법까지 실감 나게 설명했다. 영자 소설책의 한가운데를 도려내고 그 자리에 달러를 채워넣어 외교행낭으로 돈을 보냈다는 것이다. 심 의원은 "영자 소설책이 15권이나 됐는데 두께 2.5㎝ 소설책을 파내면 100달러짜리 100장 묶음 2개가 들어갈 수 있고, 15권에 채워넣었다면 30만 달러(3억 3000만 원)에 달한다"고 했다. 이어 감사원이 이를 적발하고도 덮었고, 외교부도 이 사실을 은폐했다는 것이다. 이에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당시 보고받기로 책 안에는 320달러 정도 있었는데, 200달러는 경조금이었고, 120달러는 본부직원에게 심부름시킨 돈이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물론, 거액의 외화를 외교행낭을 이용해 밀반입했느냐는 확인돼지 않았다. 그러나 외교행낭을 사적인 용도로 이용했다는 점은 인정한 것이다.

외교행낭은 외교임무 수행을 위해 본국정부와 재외공관 사이에 문서나 물품을 이동하는데 사용되는 가방, 혹은 주머니를 말한다. 영어로는 '파우치(pouch)'다. 빈 협정에 따라 어떤 경우에도 내용물을 재외공관 주재국 정부나 제3국이 열어볼 수 없고, 수색이나 압수할 수 없으며 통관도 특혜를 받는다. 외교행낭은 세관의 내용물 검사가 면제되기 때문에 이를 노린 범죄용 짝퉁 외교행낭도 간혹 나온다. 올 초 뉴욕 유엔본부에 배달된 짝퉁 외교행낭에는 시가 22억원어치의 코카인이 들어 있었다. 유엔 로고를 찍어 외교행낭을 가장해 마약을 밀수하려다 그만 못빼돌리고 DHL은 정확하게 유엔본부에 코카인을 배달했다.

외교행낭은 불순분자의 손을 타지 않도록 철저한 보안 속에 다뤄진다. 보낼 때 암호장치와 납봉을 하며 받은 이는 암호ㆍ납봉이 훼손되지 않았는지 살펴본 후 개봉한다. 극비 사항인 '가'등급의 외교행낭은 체포. 감금의 면책권이 있는 요원이 직접 수발한다. 세계 어느 항공사든 외교문서가 든 가방이나 외교 행낭과 운반자는 우선적으로 탑승하도록 국제항공협약이 체결돼 있다. 이처럼 외교행낭은 대우받는 '귀한 몸'이다.

이번 국감에서 지적된 것은 외교행낭을 이용한 외화 밀반입 여부와 함께 외교관이 사적 용도로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사적으로 사용했다고 이날 예시된 사례는 지난해 1월 감사원이 49개 재외공관에서 보낸 행낭 57개의 내용물을 확인한 결과, 적발된 내용을 되짚은 것이다. 당시 감사원은 단 4일간의 외교행낭만 조사했는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들이 귀한 몸인 외교행낭에 담겨 실려왔었다. 

남미에 출장 갔던 외교부 여직원이 사서 보낸 150만 원짜리 미우미우 핸드백, 외교행낭으로 로또 복권을 구입해 5천 원에 당첨되자 현금으로 바꿔 달라며 외교행낭으로 다시 보낸 복권, 핀란드 대사관 직원이 친구에게 보내는 보드카 5병, 노르웨이 대사관에서 보내는 와인따개 선물세트, 장난감, 커피, 초콜릿 등등... 

이게 외교임무 수행을 위해 본국정부와 재외공관 사이에 오갈 품목이었던가. 물론, 이 사실은 지난해 언론이 많이 꼬집었고 외교통상부도 외교행낭을 공적용도에만 엄격히 사용하도록 직원들에게 지시하고 문제가 된 해당 직원을 주의 조치했다. 단지, 외교행낭을 정기적으로 점검해 사적용도로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은 그때도 했고 이번에도 했다. 외교행낭을 기발하게 다목적으로 사용하는 곳은 외교통상부 뿐이니 약속도 당연한 일이다.
 
영국의 에콰도르 대사관에 숨어 있는 위크리크스 설립자인 줄리안 어산지를 영국에서 빼내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 중 하나가 외교행낭에 담아 검색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말이 되는 건 아니지만 외교행낭의 일탈을 조장하는 사람들의 사고가 그 용도를 무한 왜곡시키는 것이다. 단언컨데, 외교행낭은 죄가 없다. 자꾸 외교행낭에 범법을 담으려는 생각이 '귀한 몸'의 '소중한 역할'을 한낱 '사적 용도의 자루'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헤럴드 김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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