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내랑 대사관에 가서 투표했다. 일요일이라 투표장인 대사관 근처에 주차할 곳이, 특히 이런 소형차 한 대는 끼어서 주차할 곳이 있지 않을까 안이하게 생각했다가 혼났다. 용감하게 투엘로우라인에 잠깐 세우고 달려가 잽싸게 투표를 하고 오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대사관에 들어서니 발자국 표시를 따라 계단을 통해 이 층 회의실에 마련된 투표장으로 가는 여정이 꼬불꼬불 이어져 있었다. 시간이 좀 걸릴듯해 딸아이 차를 빌려온지라 그럴 용기가 없었다. 일요일이라도 런던 시내는 역시 공짜가 없다.
저녁에 기사를 보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미국 뉴욕에서 재외선거 투표를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신성한 권리를 행사했다"며 "미국 동포들도 투표권이 있는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투표권을 행사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굳이 그 전에 "한국 상황이 위중하다"는 말은 안해도 되지 않았을까. "대한민국의 안보·정치·경제 모두 어려운 상황"이라며 "이런 때일수록 투표에 참가해 대한민국을 잘 이끌어나갈 대표를 뽑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는데 거두절미하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신성한 권리를 행사했다. 미국 동포들도 투표권이 있는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투표권을 행사해달라" .이 정도가 가장 좋았을 것 같다.
아시겠지만 투표소 안에서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다. 그래서 투표 인증샷이라고 올리는 사진은 모두 투표소 건물 입구 현판 옆에서 찍는다. 그래도 투표했다는 인증샷이 된다. 입구까지 갔으면 투표했다는 거다. 그럼, 인증샷을 왜 자랑할까. 당신이 내 마음에 들도록 투표했다는 증거도 없는데 왜 내게 자랑이야? 이거 아니다. 투표는 어떤 결정을 했건 개인의 결정에 관계없이 투표했다는 사실로 자랑이 된다. 투표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 행사인데도 그게 자랑이 된다. 그래서 너도나도 자랑한다. 나 투표했다고. 물론 안 하는 사람이 있어서 자랑이 되는 거지만. '저 투표했어요, 여러분도 투표하세요'라고 하면 자랑도 하고 명언도 남기는 셈이다. 투표하라고 하면 된다. 더는 말을 붙이는 건 사족蛇足이요, 참견이다.
뜬금없는 얘기지만 나는 한국 선거 투표권이 있어 영국 선거 투표권이 없다. 있다면 당연히 할 것이다. 런던시장 선거에서 교통혼잡세(콘제션 차지)를 어떻게 해줄 후보를 지지해 오늘처럼 굳이 일요일에 투표하러 가는 불편이 없도록 해보겠다. 나는 할 수 없으니 영국 투표권이 있는 여러분이 해결해 주길 기대한다. 브릭시트가 좋든 싫든 내 의견을 이 지면에서 말하기 어려운데 영국 투표권이 있는 여러분이 뜻대로 결정해 해결해주길 바란다. 나는 한국의 투표권을 갖고 제대로 힘을 썼다. 그런데 영국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 힘은 영국 투표권을 가진 당신에게 있다. 단, 투표를 한다는 가정 아래 그것이 진정한 힘이 된다.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투표하는 것이다. 나처럼 영국 선거 투표권이 없는 사람을 위한 배려도 투표권이 있는 당신이 바로 투표하는 것이다. 4월 한국 20대 총선은 오늘 마감됐지만, 영국의 중요한 선거는 5월, 6월 계속 있다.
계속 물어보겠습니다. "투표하셨나요?" 들려주세요. "물론입니다!"
헤럴드 김 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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