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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알아서 기는 것에 길들여진 슬픔

hherald 2013.12.02 20:09 조회 수 : 2058



시사 주간지 <시사인>에 이런 내용의 기사가 나왔다. 11월 초 있었던 런던 한국영화제 개막작에서 '설국열차'와 '관상'이 제외된 것은 주연 배우가 송강호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니, 송강호가 어때서? 송강호는 이 두 영화에 이어 '변호인'이란 영화의 주연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소위 잘린 것이다. 아니, '변호인'이 어때서? 변호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로 활동할 당시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송강호는 노무현을 연기한 것이다. 그런데 런던 한국영화제 기간에 박근혜 대통령의 영국 국빈 방문이 있었다. 더욱이 박 대통령이 영화제 개막식에 온다니까 대통령의 눈에 송강호가 보이지 않도록 '알아서 기는' 자기검열을 했지 않나 추측하는 것이다. 개막작은 그렇다 치고 '설국열차'와 '관상'이 상영작에서도 제외된 이유는 '설국열차'는 계급투쟁을 다뤘고, '관상'은 권력 찬탈이 모티브라 제외됐다는 분석이다. 물론 나는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혹시 이것이 잘못된 추측이라면 영화제를 준비한 이들의 땀과 성을 폄훼하는 큰 잘못이 된다. 그런데 압력이 없어도 알아서 한 것이라면? 아! 알아서 기는 것에 길들여진 슬픔이라고 할까.

'알아서 기는 것'은 '알아서 하는 것'과 다르다. 최근 공공기관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니까 알아서 기는 공공기관이 하나둘 나오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공공기관의 방만 경영과 부실 문제가 도마에 오르니 임원진 연봉을 30% 자진 삭감하겠다고 나섰다. 자발적으로 자기 연봉을 삭감하겠다는 공공기관의 임원? 보장된 철밥통도 정부의 으름장에 알아서 기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 것이다.

누구보다 더 자동으로 알아서 기는 사람이나 단체가 있다. 새누리당이 정보를 주면 보수언론은 문제를 확대 재생산하고 검찰에 고발하는 일을 하는 알아서 기는 극우단체가 있다. 새누리당이 전국공무원노조와 전교조가 대선 개입을 했다고 하니 '자유청년연합'이라는 극우단체가 친절하게 검찰에 고발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새누리당 의원이 노무현 정부 말기 국가 관련 자료가 무단 탈취됐다고 주장하니 역시 극우단체 ‘국민행동본부’ 서정갑 본부장이 민주당 문재인 의원을 고발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알아서 기는 시스템이 입안의 혀처럼 논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박근혜 대통령 하야 시국미사 건도 그렇다. 박창신 원로 신부의 NLL 발언이 나오자 극우 시민단체인 ‘활빈단’이 박 신부를 검찰에 국가보안법 및 내란 음모 혐의로 고발했다. 더욱이 극우성향의 천주교 평신도 모임인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은 주한 교황청대사관에 박 신부의 파문을 건의하는 내용을 담은 고발장을 제출했다. 

다수의 애국평신도들을 대변한다는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은 독특한 인사들의 지극히 편향적인 모임이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권인숙 씨에게 "정신 감정을 해보자"던 의원과 광주 학살을 "북한 특수부대 소행"이라던 의원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이들은 지난 9월에 사제들에게 “그대들이 정교분리 원칙을 무시하고 제대를 떠나 길거리에서 선동 시위나 벌이고 싶다면, 차라리 제의(祭衣)를 벗어던지고 정치를 하라”는 내용의 광고를 냈다. 천주교 단체지만 가톨릭 계통의 신문에 낸 적은 없고 철저히 <조중동>에만 광고한다. 이렇게 알아서 기는 단체에 속한 분들을 보면 60대는 청춘이요 70대가 주류를 이루니 어른께 뭐라 말하기도 참 딱하다.

그러니 한탄하지 않는가. 보여줄 게 없어서 남겨줄 게 없어서 이런걸 대물림하나. 아! 알아서 기는 것에 길들여진 슬픔.

헤럴드 김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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