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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2015년 을미년(乙未年) 양띠해

hherald 2014.12.22 18:52 조회 수 : 1051

 
24년 전 개인적인 경험담이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신문사 편집국장은 양띠해를 맞아 1월 1일 자 발행분 1면에 양들이 있는 멋진 사진을 찍어서 넣으라고 했다. 사회부장은 '예'라고 대답했지만 소, 돼지, 개 등이 아닌 양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곧 깨달았다. 사회부 기자들과 사진부 기자들을 전부 모아 어디에서 양 사진을 찍을 것인지 물었다. 아무도 몰랐다. 당시 인터넷은 변변찮았고 모든 조사 기록은 관공서에서 직접 받던 시절. 물어물어 지리산 자락 어느 곳에 양 목장이 있다는 정보를 갖고 사진부와 함께 목장주인 인터뷰라도 따오라고 사회부 말단인 내가 따라갔다. 결과는 허탕. 몇 마리 사육하다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설령 있었다해도 몇 마리로는 신년 호 1면을 장식할 그림이 나오지도 않을 터. 양이 없어서 촬영을 못 했지만 그건 변명이 되지 않았다. "못하면 무능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돌아오는 길에 사진부 차장이 공중전화로 사회부장과 길게 통화를 했다. 내용은 자기형이 43년 계미생 양띠인데 정확히는 양띠가 아니고 염소띠라는 것이다. 지금도 염소띠로 부른다고. 그래서 양띠의 양羊은 염소라서 서양의 양을 신문에 싣는 것은 잘못된 정보를 줄 수도 있다는 억지 춘향이었다. 촬영 못 한 잘못을 피하려 이야기를 그렇게 만들어 갔고 부풀렷다. 민화 속 양의 모습은 모두 염소가 그려져 있다, 달력에도 그렇게 그려져 있다, 십이지신상에도 염소가 있었다, 라고 밀어붙여 결국 그해 신년 호에는 일출을 배경으로 어느 유명 시인의 시가 실렸고 우린 빠져나왔다.

여담이 길었는데 런던을 조금만 벗어나도 지천으로 꼬물거리는 양 떼를 보면 그 시절이 떠오르곤 했는데 곧 양띠해를 맞는다니 다시 생각났다. 사실 우리나라는 양이 흔하지 않다. 그래서 양에 관한 얘기도 많지 않다. 양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시대 금나라로부터 제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라는데 정확하지 않다. 훨씬 이전인 삼한시대에는 양을 식용으로 썼다는 이야기가 있고, 신라와 백제가 왜나라와의 무역 기록에 양을 받았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래도 양이 착하고 순한 이미지로 환영받는 동물이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양은 무릎을 꿇고 있는 시간이 많아 털이 없고 굳은살로 되어있는데 이처럼 무릎을 꿇고 젖을 먹는다고 은혜를 아는 동물, 기력이 떨어진 늙은 아비 양에게 젖을 물려 노후를 봉양하는 효심 있는 동물, 좀처럼 싸우지 않고 다른 동물에게 해를 끼칠 줄 몰라 평화의 동물, 그리고 언제나 희생양, 속죄양이라는 이미지로 희생의 상징물이었다.
민간에서도 양띠인 사람은 점수를 따고 들었다. 양을 닮아 온화하고 친절하며 유순하다는 선입견 덕을 톡톡히 봤다. 아들을 바라는 시어머니는 딸을 원치 않는 법. 더욱이 여자아이의 사주가 좋지 않다는 말띠, 범띠 해에 딸을 낳으면 더 미운털이 박혔다. 그런데 양띠 해만은 여자아이를 낳아도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양띠에 태어난 사람은 어느 띠보다 큰 환영을 받았다.
또한, 태조 이성계의 꿈 이후 양 꿈은 길몽으로 해석된다. 어느 날 이성계가 꿈속에서 양을 잡으려고 하자 그만 뿔과 꼬리가 몽땅 떨어져 나갔다.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꿈 얘기를 했다. 무학대사가 이성계보다 더 놀라며 곧 임금에 등극하리라 해몽했다. 양(羊)자에서 뿔과 꼬리가 떨어져 나감은 바로 임금 왕(王) 자를 뜻한다는 것.

다 좋다는 양의 해. 한 가지 걸린다면 ‘양띠는 부자가 못 된다’는 우리 속담.양띠 사람은 양과 같이 순하고 정직해서 부정을 보지 못해 부자가 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부정을 못 해 부자가 못 된다? 살펴보니 나쁜 게 아니다. 그래서 '羊'의 글자 모양을 파자하면, 아름다움(美)과 착함(善)과도 통한다고 한다. 올해 새해를 맞으면서 빌었던 소원을 기억하시는지. 잊었든 기억하든 2015년 을미년(乙未年) 양띠해, 새해 소원은 그때보다 더 착하고 아름다운 소원이 되기를.  
 
헤럴드 김 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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