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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때아닌 황희 정승의 청백리 논쟁

hherald 2015.05.04 18:38 조회 수 : 1053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 이완구 총리가 사퇴할 때 그를 옹호하려고 이완구 총리를 황희 정승에 비유했다. 김 의원은 "이것저것 다 뒤집어서 사소한 것부터 온갖 걸 다 쑤셔놓는데 점잖은 선비들이 이를(총리를) 하려고 하겠나. 이래서 우리가 인물을 키우지 못하고 오히려 씨를 말린다." 면서 "조선 명재상으로 추앙받는 황희 정승이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간통도 하고 무슨 참 온갖 부정청탁에 뇌물에 이런 일이 많았다는 건데 그래도 세종대왕이 이분을 다 감싸고 해서 명재상을 만들었다."고 했다. 소위 황희 정승의 간통 뇌물 발언이다. 그러자 격노한 황희 정승 후손들 모임인 장수황씨(長水黃氏) 대종회가 원로회의와 회장단 회의를 긴급 소집해 김 의원을 상대로 강력 대응키로 했다. 그러자 김 의원은 "새 총리 선출 절차의 어려움에 대해 얘기하던 중 우리는 왜 인물을 키우지 못하는지 개탄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황희 정승 후손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며 재빨리 사과했다.

요즘 공직자 인사를 보면서 "지금 같은 검증 시스템에서는 황희 정승이 와도 통과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총리를 비롯한 장관 후보자에게 요구되는 기준이 너무 높고 엄격해서 조선 최고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황희라도 요즘의 잣대를 댄다면 인준을 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로야 황희 정승은 청백리의 상징 아닌가. 

우리가 자라면서 들은 황희 정승 이야기. 세종대왕이 일반인 차림으로 황희 정승 집에 가니 멍석을 깔고 밥상에 누런 보리밥과 된장에 고추를 먹어 놀랐다는데...붓으로 먹을 찍어 글씨를 쓰려고 하는데 종의 아이가 그 위에 오줌을 쌌지만 아무런 노여운 기색도 없이 손수 그것을 치웠다던데...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사실이란 근거는 없다. 사람들이 황희에게 모두가 원하는 정승의 이미지를 덧씌운 것이라고 봐야 한다. 입으로 전해져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더 엄격히 말하면(기록을 근거로 정확히 살펴보면) 황희 정승은 청백리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황희 정승은 요즘 기준으로 인사 청문회를 절대 통과할 수 없다. 아니, 청문회가 지금보다 더 쉬웠다고 해도 황희는 통과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는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비판을 받았다."고 돼 있다. 사위가 누굴 때려 죽였는데 이를 구명하려 사건을 조작했고, 처남들의 위법 행위를 변호했고, 아들이 한 도둑질을 감추려 하는 등 자식과 친인척에 관련된 일에는 물불을 안 가렸다. 친인척 관리가 이 정도면 요즘 인사 청문회 통과 못 한다. 그리고 대사헌이 되면서 금을 받았고 매관매직에 지나치게 많은 노비를 소유해 재산 형성과정이 불투명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어디서 번 돈인지 불분명한 재산이 이렇게 많아지면 청백리란 말은 안 어울린다. 또 하나 결정적으로 도덕적 문제. <세종실록>에는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맞섰던 박포란 사람의 아내가 등장한다. 박포의 아내는 노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는데 다른 노비가 이 사실을 알자 박포의 아내는 그를 죽여 도망자 신세가 됏다. 그는 황희의 집 정원에 있는 토굴에 숨기었다. 범인이 황희의 집에 숨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여인은 이곳에서 수년간 숨어 살다가 당국의 수사가 종결된 다음 다른 곳으로 떠났다. 황희는 숨겨주는 조건으로 토굴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이상이 소위 황희 정승의 간통 뇌물 기록의 극히 일부분이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청백리의 이미지를 얻었나에 대한 답은 <세종실록>에 나온다. 이미지 관리를 잘했다는 것. 

탐관오리를 청백리로 떠받든 조선시대 사람들의 잘못을 보면서 아직 억지라도 황희 정승에게 청백리의 모습을  한다면
 

헤럴드 김종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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