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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힐스보로 참사와 세월호의 만남

hherald 2016.05.02 18:17 조회 수 : 1344

 

영국 축구사에 가장 치욕스런 흑역사라면 힐스보로 참사를 꼽을 것이다. 1989년 4월 15일에 일어난 이 사건은 경찰 과실로 축구장에서 96명이 압사하고 766명이 다친 참사였는데. 이 사건이 더욱 처참한 흑역사가 된 것은 정부와 경찰과 언론이 한통속이 되어 사실을 은폐하려 했기 때문이다. 무고한 목숨의 억울한 죽음을 두고 유족들은 27년의 세월을 싸웠고 며칠 전 2016년 4월 26일에야 진실이 밝혀졌다. 힐스보로 참사는 팬들의 잘못이 아니라 경찰의 태만에 의한 과실치사라는 평결이 나온 것이다.

 

 

힐스보로 참사를 설명하려면 먼저 헤이젤 참사를 얘기해야 한다. 1985년 5월 29일 유로피언 컵 결승이 열린 벨기에 브뤼셀 헤이젤에 있는 보두앵 경기장에서 일어난 참사다. 잉글랜드 리그의 리버풀과 세리에 A의 유벤투스가 격돌했는데 축구보다 더 심각한 격돌은 양 팀 서포터 사이에 발생했다. 당시 유럽에서 악명을 떨치던 리버풀의 훌리건들이 유벤투스 응원석으로 들어가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차별 폭행, 충돌이 생겼고 그 와중에 낡은 경기장의 벽이 무너져 39명이 사망하고 454명이 상처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훌리건 29명이 구속됐고, 잉글랜드 클럽팀들은 5년간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됐다. 리버풀은 7년간 금지됐다.  

 

 

당시 대처 총리은 훌리거니즘에 대해 무지했다. 대처리즘이 몰고온 급격한 산업화와 현대화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생겼고 그들이 쌓인 울분과 분노를 표출하는 곳이 축구장이었다. 따라서 훌리건은 사회적 산물이건만 대처는 훌리건 문제의 책임을 축구협회에 돌렸고 축구팬을 보호하기 보다는 격리하려 했다. 결국, 훌리건이 경기장에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 관중석에 철망을 세우는 졸속 처방이 나왔다. 사고는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이 벌어진 1989년 힐스보로 경기장에서 터졌다. 리버풀 응원단의 버스가 늦게 도착해 서둘러 경기장에 들어가다 보니 정원 1,600명 입식 관중석에 3,000명이 몰렸다.(당시 입식 관중석은 가난한 서민들이 애용했다.) 이미 입장한 관중은 뒤에서 사람이 계속 밀고 들어오는데 앞은 철망에 막혀 압사 당하거나 질식사할 지경이었다. 경기 시작 5분 뒤 사람에 밀려 철망이 무너지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경기가 중단됐다. 이미 96명이 압사한 뒤였다.

 

 

그런데 타블로이드 신문인 <더 선>은 "사고 현장에서 리버풀 훌리건들이 사망자들의 주머니를 뒤져 물건을 훔치고, 경찰을 폭행했다"는 거짓 기사를 썼고 경찰은 "피해자들은 티켓 없이 들어온 술 취한 관중들"이라고 거짓 발표를 했으며 대처 총리는 경찰을 감싸고 돌았다. 리버풀 팬들 사이에는 <마가릿 대처가 죽으면 파티를 열 거야>라는 응원가가 생겼고 리버풀 시민은 오늘도 <더 선>을 읽지 않는다. 

 

 

정권과 그에 빌붙은 언론과 경찰이 한통속이 돼 진실을 감추려 했지만 결국, 힐스보로 참사의 원인은 마가렛 대처 총리의 고압적인 경제 정책으로부터 파생된 훌리거니즘과 국민의 안전을 등한시한 정부 관계자들의 무지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어느 희생자의 어머니는 경찰 과실치사라는 평결이 나오자 "리버풀 사람들은 서로를 위해 싸웠고 결국 승리를 끌어냈다. 그들은 불의에 대항해 하나였다."라고 말했다.

 

 

힐스보로 참사를 장황하게 얘기했는데 5월 10일, 11일 영국에 오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힐스보로 참사 유가족을 만난다고 한다. 진실규명이 이리도... 그분들의 만남 앞에... 세월호의 현실을 생각하니 또 가슴이 먹먹하다.

 

헤럴드 김 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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