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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2012년 5월 26일의 치킨 게임

hherald 2012.05.28 19:18 조회 수 : 2652




지난 토요일 2012년 5월 26일은 영국의 한인사회가 모처럼 분주한 날이었다. 영국에서 축구를 하는 젊은 자원이 정말 그만큼 많을까 놀랄 정도로 청소년들이 참가하는 축구경기가 두 곳에서 동시에 열렸다. 해마다 열리는 한국의 전국체전에 참가할 대표선수를 선발하는 체육회 주최의 경기와 영국에서 열린 유럽한인연합회의 체육대회 첫날 일정인 축구대회가 그것이다. 두 대회 모두 사전에 계획된 것이고 5월이 대회를 열기에 적기인 것은 사실이나 유독 이날을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고 강행한 것은 행사를 진행한 두 단체 모두가 양보하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훨씬 넘어 양보하면 겁쟁이가 된다는 '치킨 게임(chicken game)'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 느낌이 아니라 영락없는 치킨게임이다.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자동차 게임에서 유래한 치킨 게임. 길 양쪽에서 서로의 자동차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다가 한쪽이 핸들을 꺾으면 지는 게임. 여기서 핸들을 꺾으면 겁쟁이 치킨이 된다. 한쪽의 겁쟁이가 나오면 한쪽의 영웅이 나오는 경기. 물론 그 집단 내에서만 영웅이 되지만 어쨌든 핸들을 꺾지 않으면 영웅이 된다. 그런데 양쪽 모두 영웅을 꿈꾸며 끝까지 핸들을 꺾지 않으면? 결과는 아찔한데 2012년 5월 26일은 결국 양쪽이 모두 끝까지 돌진했다. 치킨이 되기는 죽기보다 싫다는 심정이었나 보다. 

치킨 게임으로 5월 26을 한번 보자. 두 단체가 모두 핸들을 꺾었다면 아무도 피해가 없다. 설령 한 쪽이 핸들을 꺾었다고 그가 치킨이 될까. 이 경우 핸들을 꺾은 쪽은 양보를 한 쪽이고 게임의 승자는 양보한 쪽이 아닐까. 그러면 최악의 경우는 무엇일까. 어느 쪽도 핸들을 꺾지 않는 경우다. 아예 핸들에 손을 묶어 버리고 치킨이 되기보다는 죽겠다는 작정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5월 26은 그렇게 돌진했다. 진짜 치킨 게임처럼 죽어나가지는 않았지만 돌진한 두 단체가 정면 충돌한 그곳에는 깊고 깊은 골이 파였다.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그 골이 생길 것을 알고도 돌진한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이 깊은 골이 치킨 게임을 벌린 사람들만의 문제라면 그나마 방관이라도 할 텐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단순히 축구가 좋아 모여 공을 차는 청소년까지 이 무모한 치킨 게임의 한쪽에 서라고 강요하는 모양이 됐다. 명분에 목마른 어른들이 청소년을 동원해 그 허접한 명분 쌓기에 밀어 넣은 꼴이 됐다. 청소년이 공을 차고 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어른의 도리이건만 어른들의 끝장 승부에 말린 청소년들은 이제부터 공을 차는 것도 방향을 봐가면서 차야 하는 딱한 처지가 됐다.

이날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는 '나는 꼼수다'의 런던 공연이 열렸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젊은이들이 맑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마침 석가탄신일 행사가 있었던 연화사에는 고운 연등이 환하게 걸렸다. 이런 풍경은 2012년 5월 26일의 치킨 게임과 아무 상관 없다. 

헤럴드 김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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