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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태극기를 구출하자

hherald 2017.02.20 19:31 조회 수 : 1004

 


독일에 이어 영국에서도 태극기 집회가 열린다. 왜 자랑스러워야 할 태극기가 요즘 이리도 불편한 대상이 됐을까. 촛불은 종북이고 태극기는 호국이라는 망측한 프레임은 누가 어떻게 만든 걸까. 헤럴드 단상은 오늘 경향신문 오창민 논설위원의 <태극기를 구출하자>는 칼럼으로 답을 대신 찾아본다.  헤럴드 김 종백

 

태극기를 구출하자

2015년 11월13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프랑스 파리의 축구 경기장과 콘서트장 등에서 인질극과 무차별 총살, 자살폭탄 공격이 벌어졌다. 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최악의 연쇄 테러 배후는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였다. 파리 시민들은 동요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어두운 밤 에펠탑을 장식한 청·백·적색의 삼색기 조명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기원한 삼색기는 자유(청색), 평등(백색), 박애(적색)를 상징한다.

 

프랑스에 삼색기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태극기가 있다. 태극기의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인의 민족성을 나타낸다. 가운데 태극 문양은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으로 생성·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했다. 구한말인 1882년(고종 19년) 처음 등장해 굴곡 많은 근·현대를 거치며 자연스럽게 국가 상징으로 굳어졌다. 태극기에는 한국인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자랑스러운 그 무엇이 있다. 일제에 항거한 선열들의 혼과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 성장을 이뤘다는 자긍심이다. 압제와 불의에 저항한 한국인의 유전자도 담겨 있다. 1960년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혁명이나 1980년 5월 광주항쟁,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때 시민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경에 맞섰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함성과 함께 넘쳐난 태극기의 물결은 감동과 신명 자체였다. 한국인을 하나로 묶고 한국의 영속성을 보장해주는 태극기의 힘이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나 요즘 태극기를 보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다가오는 삼일절에 태극기를 대문에 달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장년층은 태극기를 보며 박정희 유신시대와 국가주의 망령을 떠올리고, 청년층은 태극기를 정파적 도구로 여기고 있다. 보수 정권이 들어선 이후 특정 세력이 태극기를 독점하면서 벌어진 결과다. 선거 때마다 극우 성향의 후보들은 태극기를 두르고 캠페인을 벌였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장은 정권에 대한 추종을 태극기 사랑으로 포장해 국경일마다 태극기 게양을 강요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조롱하는 집회에 태극기가 등장하고, 역사교과서 국정화 찬성 시위에도 태극기가 빠지지 않았다. 약자 중의 약자인 성 소수자들에게 삿대질을 하는 사람들 손에도 태극기가 있었다.

결정판은 이른바 ‘태극기 집회’다. 부정부패와 헌법 위반으로 탄핵 위기에 몰린 박근혜 대통령은 ‘촛불’과 ‘태극기’를 대립시키며 반전을 시도하고 있다. 탄핵 반대 태극기를 든 사람은 애국자, 탄핵 찬성 촛불을 든 사람은 매국노로 편가르기에 골몰하고 있다. 박 대통령 대리인단의 한 변호사는 헌법재판소 법정에서 태극기를 꺼내 보여주는 쇼까지 벌였다. 국정농단의 공범인 친박 세력도 태극기 마케팅으로 부활을 꿈꾸고 있다. 탄핵 반대 집회에 태극기를 들고 나가 애국, 안보 운운하며 사람들을 선동한다. 신성한 태극기로 오물을 닦고 악취를 덮는 파렴치한 행위이다. 태극기 같은 국가 상징의 핵심 기능은 국민 통합과 애국심 고취이다. 이를 통해 국가를 영속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과 국정농단 세력의 태극기는 한국을 욕되게 하고, 불안과 폭력을 조성하며, 시민들을 갈등과 분열로 내몰고 있다.

 

 

태극기의 위기는 대한민국의 위기이다. 여기에는 지식인과 시민들 책임도 있다. 국가주의를 극복하고 극우 세력과 뒤섞이지 않기 위해 태극기를 일부러 멀리하고, 국가·국민·애국심 등의 단어까지도 의도적으로 기피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양철북>으로 유명한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히틀러의 범죄 악몽 때문에 애국주의라는 가치를 우파의 전유물로 방치한 것을 독일 좌파의 중대한 오류라고 지적했는데 이는 2017년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태극기는 소중하다. 어린이들이 유치원에서 맨 먼저 배우는 노래 중 하나가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이다. 초·중·고교 교실에는 어김없이 태극기 액자가 걸려 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암송되고 있다. 한국인 절대 다수가 태극기를 사랑한다. 이런 태극기를 극우 비리 세력이 독점하도록 내버려두면 당장의 정치 권력은 물론 한국의 미래도 그들의 손에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이번 삼일절에는 태극기를 달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연루자들을 단죄하고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마음을 담고 싶으면 노란 리본을 깃봉에 매자. 국정농단 세력의 볼모가 된 태극기를 이제 구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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