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선거 참패 책임을 계파 간 네 탓 내 탓 타령으로 내홍이 깊은 더불어민주당에 수박 논쟁이 뜨겁다. 우상호 비상대책위원장이 '수박'이란 단어를 못 쓰게 하겠다고 경고했는데 수박을 인신공격과 당내 계파 간 분열을 조장하는 언어로 본 것이다. 수박이 무슨 잘못을 했을까.
수박은 광복 후 빨갱이 논쟁에 단골로 오른 과일이었다. 한국에는 해방 후 3종류의 빨갱이가 있었는데 수박 빨갱이, 토마토 빨갱이, 사과 빨갱이. 당시 사회주의자를 빨갱이로 보는 세상이었기에 사과 빨갱이는 겉으로는 사회주의자이지만 속으로는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고, 토마토 빨갱이는 겉도 안도 사회주의자인 사람, 수박 빨갱이는 겉으로는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것 같지만 사실 속으로는 사회주의자라는 것이다. 수박 빨갱이가 가장 무섭다고 하는 이유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알 수 없어 무섭다는 것이다. 1947년 발행한 <독립신보>에 '수박같이 거죽은 퍼렇고 속이 붉은 것은 기회주의자일 것이요'라는 말이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의 수박 논란은 대선 경선 과정에서 한 차례 불거졌다. 이재명 후보가 '우리 안의 수박 기득권자들'이라 표현하자 이낙연 후보가 수박은 일베 용어이자 5.18 민주화운동을 폄하하는 용어라고 했다. 한쪽이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의 일상 용어'라고 주장하자 다른 쪽은 '일베가 5.18 당시 신군부에 의해 광주 시민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마치 수박이 깨지는 것에 빗대 조롱한 용어'라고 주장했다. 수박이 홍어(희생자의 주검을 홍어로 비하)와 함께 5.18 희생자를 조롱하고 모독하는 대표적인 표현이 됐다.
이후 이번 대선을 치르면서 수박은 '민주당 안에 있는 보수 인사'를 지칭하는 은어가 됐다. 주로 이재명 지지자들이 이낙연 측을 공격하는 용도로 많이 쓰였다. 겉은 파랗고 속은 빨간 수박이 민주당인 척하지만, 사실은 국민의힘 편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 빨간색이 국민의 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이나 이재명 의원을 비판하면 '너 수박이지?'하는 말이 돌아오는데 바로 이런 뜻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원욱 의원과 김남국 의원 사이의 수박 논쟁도 이런 선상에 있다.
'자기 집 두레박줄이 짧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집 우물 깊은 것만 탓한다'는 속담이 있다. 수박은 지금 네 탓 내 탓의 애꿎은 희생물이 됐다.
아무리 좋은 말로 수박이란 단어의 앞뒤를 포장해도 지금 수박은 수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수박을 정치에 담그니 이 모양이 된 것이다. 더운 여름날 한없이 고마운 과일인데 이 모양이 됐으니 수박이 스스로 정치와 거리두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겠다.
헤럴드 김 종백
런던 코리아타운의 마지막 신문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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