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순조 때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은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산속 굴에 숨어 중국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청국이 간섭해 막아주든 외국 군대가 조선을 침범해 막아주든 해달라는 극악무도한 내용이라 역적 행위로 발각됐을 때 조금도 억울할 것 없을 정도였고 그래서인지 그 후손들도 황사영이 할아버지인 것을 부끄러워 숨기고 싶어 할 정도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가 쓴 백서,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황사영 백서. 60cm쯤 되는 2자 길이의 명주천에 1만 3,311자를 썼다. 백서라고 한 것은 바로 명주 천에 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흰 종이 백서 白書가 아니고 비단 종이 백서 帛書인 것이다.
백서의 기원은 영국이다. 영어로 white paper. 영국 정부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발간하는 보고서의 표지가 흰색이라 백서로 불렀다. 영국 정부가 보고서를 발간해 일일이 국민에게 줄 리야 없으니 주로 정부에서 의회에 제출하는 보고서를 백서라고 한다. 17세기부터 있었으니 영국이 의회민주주의의 뭣이라고들 하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영국에는 청서 blue paper도 있는데 의회에서 발간하는 보고서의 표지가 파란색이라서 그렇게 부른다. 의회가 다른 기관에 제출할 용도로 보고서를 만들지는 않으니 청서는 의회에서 특정 주제나 사건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알리는 문서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도 정부 기관에서 백서를 발행한다. 우선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면 그 정권에서 어떤 정책을 펴고 추진했는지 정리해서 내는 것이 '국정백서'다. 국방부는 국방백서, 외교부는 외교백서, 기획재정부는 경제백서를 낸다.
흑서도 있다. 백서에 반대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대외비를 지켜야 하는 문서를 흑서 black paper라 부른다. 그래서 대외비는 아니지만, 비공식적인 문서, 일반인이 보기 힘든 문서를 '회색'으로 부른다.
그런데 백서의 원래 뜻과는 다른 흑백논쟁이 최근 한국에서 뜨겁게 인다. 이번에 조국 전 장관 관련 서적 두 권이 나와서 때아닌 백서, 흑서 경쟁이 됐는데 여기서 백서, 흑서는 표지 색과 관계없이 '친 조국' 책은 백서, '반 조국' 책을 흑서로 불린다. 찬, 반 양 진영이 구매 경쟁을 벌여 두 책이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한다. 싸움 모양은 진영 내의 진영 싸움, 양상은 아주 격렬. 급기야 돈이 얽힌 구린 얘기가 나와서 보는 심정이 좋지 않다.
현대에는 백서라는 말이 '종합 보고서'로 해석된다. 일이 있고나서 이렇듯 백서를 발간하는 것은 단지 요식행위가 아니라 과거를 되돌아보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목적이 크다. 친 조국 백서와 반 조국 흑서는 이런 목적을 담고 있을까. 설령 있다 한들 나 같은 서민이 백서 흑서를 읽으면 그 목적을 찾아 이해할 수 있을까. 불평등의 불편함으로 인해 그 이름부터 나 같은 서민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먼 곳에 있는 듯한데 말이다.
헤럴드 김 종백
런던 코리아타운의 마지막 신문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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