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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이승만 왈(曰) "내 국적은 일본"

hherald 2013.10.07 19:26 조회 수 : 2463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18년 미국에 있을 때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서류가 발견돼 논란이 되고 있다. 이승만이 직접 자필로 작성한 서류다. 이 전 대통령이 직접 필기체로 작성한 1차대전 징집서류에 자신의 국적을 ‘일본’으로 기재했다. 물론 1918년은 식민지 국민으로 전락한 시기지만 그가 미국에서 외교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되는 시기여서 논란이 된다.

당시 미국에 있던 한국인은 이런 종류의 서류에 한국, 중국, 일본 등 다양하게 국적을 쓰긴 했다. 그래서 이승만도 일본인으로 하면 아시아 열강의 국민으로 보여 좀 나을 것으로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러나 다음 해 1919년이면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다는 그가 국적을 일본으로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늘 논란이 되는 그의 '친일성향'을 배제하기가 힘들다.

친일 행각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것이 루스벨트와의 만남이다. 고종의 밀사로 간 것이 아닐까 하는 설이 있었고 이 일로 한국에는 '청년 지사'로 알려졌지만 당시 미국 신문을 보면 딴판이다. 

1905년 8월 4일 <뉴욕 데일리 트리뷴>은 '오이스터베이의 한국인'이라는 기사에서 루스벨트를 만난 윤병구 목사와 이승만의 대화를 소개했다. 윤병구와 이승만은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라는 단체의 대표자로서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라는 위임을 받았다. 황제는 한국인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수천 명의 회원이 있는 일진회가 빠르게 성장해 곧 국무를 장악하고 정부 구실을 할 것"이라고 했다. 같은 날 <워싱턴 타임스>도 "이들은 일진회로 알려진 한국의 거대 진보정당을 대표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스타크 카운티 데모크라트>는 기사 제목을 "한국은 삼켜질 것을 주저하지만 러시아보다 일본의 목구멍을 선호한다."라고 했다. 이승만이 내세운 '일진회'라는 친일단체는 1904년 8월 한국을 일본에 팔아먹어야 고물이 떨어지는 인사들이 모여 만들었는데 일이 있을 때마다 한일병탄을 주장하다 1905년 을사늑약을 이끌어냈고, 드디어 1910년 8월 22일에 숙원이던 경술국치(한일합방)이 체결되자 9월 26일에 그 친일적 소임을 다하고 해체했다. 물론 일제 시절 자손 대대로 일본의 노비로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승만의 또 다른 친일 사례는 많다. 미국 기독교계 인사들의 주선으로 공부하던 1908년, 스티븐슨을 처단한 장인환 의사의 통역 의뢰를 받고 “예수인 신분으로 살인 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며 거부해 교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승만은 이봉창ㆍ윤봉길 의사 등 의열 투쟁도 비판했다. 1913년 <워싱턴 포스트> 회견에서 “(병탄 이후) 불과 3년이 지나기도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고 일제의 식민 통치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1915년에는 미국 신문에 “우리는 어떤 반일적 내용도 가르치지 않는다. 정반대로 우리는 전 인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나는 우리 백성들이 어떠한 반일 감정도 일으키지 않길 바란다”고 기고했다. 보면 볼수록 파면 팔수록 뉴라이트와 친일파 후손과 극우파의 입맛에 맞는 부분이 많다.

이승만은 4ㆍ19혁명 뒤 대국민 사과 없이 망명했고 1965년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자신의 국적을 일본이라고 쓴 이국의서류로 다시 떠오른 그의 기억이 무척 쓰리다.

헤럴드 김 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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