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제2의 도시, 버밍엄이 '파산'했다. '섹션 114' 결정을 했으니 실질적인 파산 선언을 한 것이다. 섹션 114는 1988년 만든 법으로 지방의회 재무 책임자가 지자체의 수입으로 지출 약속을 이행할 수 없다고 판단할 경우 내리는 조치다. 개인이나 기업이 파산하면 '빚잔치'를 하는데 법원은 채무자의 재산을 처분해 채권자들에게 공정하게 배분한다. 그런데 지자체는 지역 주민들에게 공공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래서 빚잔치로 청산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재정을 어떻게든 마련해서 다시 살려야 한다.
인구 114만의 버밍엄은 영국 제2의 도시다. 영국에서 런던 다음으로 큰 도시가 자력으로 통상적인 행정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제 취약 계층 보호와 같은 꼭 필요한 곳에만 돈을 쓴다. 새로운 지출은 아예 허용되지 않는다. 버밍엄 당국은 재정을 재건하려 직원 약 1만 명에게 자발적 퇴직 의사를 물었다. 부동산 등 시에서 갖고 있는 돈 되는 자산을 매각하려고도 한다.
파산 원인은 법인세 급감 등으로 수입은 줄고 온라인 시스템 보완, 복지 서비스 확충 등 지출은 늘었기 때문이다. 보수당의 중앙정부와 노동당의 지방정부 사이의 마찰도 문제였다. 노동당은 보수당 집권 이후 시에 대한 중앙정부 보조금이 10억 파운드나 줄었다고 했다. 정부가 야당이 장악한 지역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직접적인 원인은 재판에 진 것이다. 버밍엄시에서 여성이 많은 직종에 보너스를 안 줬다고 소송을 당해 패소했다.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줘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20억 파운드를 물게 됐다. 지금까지 우리 돈으로 2조 원 가까이 지급했는데 아직 1조 원 넘게 더 내야 한다. 시 당국이 손을 들어버렸다.
최근 3년 동안 파산을 선언한 영국 도시는 7개. 크로이던시는 3년 연속 파산을 선언했다. 영국 지방행정의 위기론이 나오는 이유다. 영국 시의회 47곳에서 자체 조사해 보니 2년 내 파산 위험이 있는 도시가 26곳이라는 놀랄만한 결과가 나왔다. 포퓰리즘에 가까운 사회 복지 부문의 지출이 커지면 이를 메우려 시에서 무리한 사업 추진과 위험한 부동산 투자를 하고, 부채가 쌓이고... 이렇게 가다가 파산한다.
지자체의 파산이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미국, 일본, 유럽 등지에서 파산한 도시 사례에서 볼 수 있다. 도시가 파산하면 시민이 힘들다. 돈을 거두려고 세금을 올리고 돈을 아끼려고 공무원을 줄인다. 그러니 공공서비스의 질이 나빠진다. 섹션 114, 파산한 도시는 고장 난 가로등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고칠 여력이 없는 것이다.
헤럴드 김 종백
런던 코리아타운의 마지막 신문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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