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있는 런던한국학교와 강북런던한국학교의 뿌리가 되는 '재영어린이학교'가 설립된 것은 1972년. 과거를 더듬어 보면 강철수 전 한인회장, 정종화 교수, 김성열 동아일보 영국 특파원 등 당시 학교 건립에 큰 역할을 했던 분들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다 대사관에서 학교설립추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한 당시 영사였던 권인혁 전 주프랑스 대사도 빠지지 않는다. 당시 권 영사의 열정과 공로는 강철수 회장이 정리한 한인회 기록, 원로들의 증언, 학교 설립 당시 교사로 봉사했던 정미령 옥스포드 대학교수도 인터뷰에서 인정했다. 그런데 이번에 서울에 사는 지인에게 부탁해 권 전 대사 인터뷰를 했는데 영국 근무 당시 많은 것을 들려주면서도 학교 설립에 관한 자신의 공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 겸손인지, 원래 드러내지 않는 인품인지... 직접 인터뷰를 하지 않아 나도 언급 않겠다.
권인혁 영사를 기억하는 한인은 드물 것이다. 50년 전, 1970년 전후 영국에 거주했던 한인이 무척 적었고 있다 해도 대부분 유학생이거나 주재원이었다. 그래서인지 권 전 대사가 현재 기억한 교민은 김장진 씨 한 사람뿐이었다. 영국에 짧게 근무했고 주프랑스 대사를 비롯해 주로 불어권 국가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기에 영국에 대한 기억이 희미할 수도 있고 그의 추측에 당시 교민이 100명 안쪽이라니 만난 이가 적었으리라 공감하는데 김장진 씨를 기억하는 일화는 이렇다. 당시 대사관은 첼시 근처 카도간스퀘어에서 건물 일부를 빌려 쓰고 있었고 직원은 7명 남짓. 어느날 스페인에서 왔다는 한국인이 공관을 찾아왔다. 5파운드 지폐를 보이며 가진 게 이것밖에 없는데 영국에서 살도록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김장진 씨에게 데리고 갔다고 한다. 김장진 씨에게 부탁해 영국 식당에 취업했는데 나중에 그 교민이 크게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재외공관을 찾아가 먹고살게 도움 좀 달라 하는 얘기는 왠지 호랑이 담배 피울 적 같은데 그런 부탁을 받은 영사가 직접 그를 데리고 아는 누군가에게 가서 이 사람 좀 도와달라고 대신 부탁하는 생소한 풍경이 그려지시는지.
그를 헤럴드 단상에 불러온 이유는 따로 있다. 영사로 있을 때 비자 연장을 하러 온 한인 중에 허름한 차림새의 못 보던 한인들이 많이 왔는데 알고 보니 독일에서 온 광부들이었다. 독일에서 비자 연장을 않고 왜 왔냐고 하니 주영대사관에 가면 비자 연장을 잘해준다고 소문이 났다고, 아마도 독일 광부로 와서 학업을 하거나 다른 직업을 갖는 경우가 있어 독일 정부가 비자 연장을 까다롭게 했던 모양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그가 독일에서 온 한인들에게 비자를 준 이유는 비자를 안 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라 했다. 재외공관이 할 일 중 하나가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인데 살려고 외국에 온 자국민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게 당연하고 비자에 문제가 없는데 안 되는 이유를 찾아서 안 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듣기엔 쉽지만 이런 공무원이 나는 생소하다. 더욱이 1970년이라는 시대를 고려하면 더 그렇다. 비자 스탬프에 걸린 이국 생활의 목숨줄, 인심 좋은 주영대사관 영사의 비자 스탬프를 찾아 영국까지 온 독일 광부들의 초조한 기다림, 1970년대 초반 그 생소한 풍경이 그려지시는지.
<코벤트 가든에서 피세문까지>. 35년 외교관 생활을 한 권인혁 전 대사가 쓴 책이다. 1970년 주영 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코벤트 가든'을 들어서서 프랑스 대사를 지내고 파리의 한국정원 대문인 '피세문'을 통해 나온 그는 어떤 세계를 나름 만들었을까. 기회가 된다면 만나서 1970년 런던의 한인사회를 청운의 외교관과 기억으로 동행해보고 싶다. 만나지 않고도 팬이 될 수 있음을 고백하며 50년 전의 노고에 늦은 감사를 보낸다.
헤럴드 김 종백
런던 코리아타운의 마지막 신문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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