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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1919년 3·1운동 얼마 뒤 일본군이 수원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총을 쏘고 불을 질러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묻힐뻔한 이 사건을 현장에 달려가 사진 찍고 보고서를 만들어 전 세계에 알린 이는 독립유공자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교수다. 한국 이름은 석호필(石虎弼), 영국 태생의 캐나다 선교사이자 수의사인데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사후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여기서 알리려는 사실은 캐나다 토론토에 그의 동상이 있다는 것. 한국 정부가 주도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외국인 동상을 건립한 첫 사례다. 그가 공부한 토론토 대학교에는 기념관도 있다.

 

영국에도 해외독립운동가 동상을 세울 계획이다. 바로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 선생의 동상을 그의 고향인 브리스톨시에 건립한다는 계획이다. 1904년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의 전신)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한 베델은 신문을 통해 일제 침략을 국제사회에 알렸고 헤이그 밀사 사건,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관여한 독립유공자다. 일제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당시 일제는 모든 신문을 검열하고 언론 통제를 했으나 대한매일신보는 치외법권 자격을 가진 영국인이 발행인이라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 대한매일신보 사옥은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본부로 사용될 정도였다. 일제는 베델을 추방하거나 신문을 폐간시키려 영국 정부에 계속 압력을 넣었고 영국 사법부는 베델을 두 차례 재판했다. 일제의 집요한 괴롭힘, 두 번의 재판, 근신과 금고형 등으로 건강을 해쳐 37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베델 선생 사망 뒤 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영국 런던으로 돌아갔다. 재산 대부분을 신문 발간에 사용해 남은 가족들의 생활은 어려웠다고 한다. 
1968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68년 7월 15일 한국 정부는 영국의 <더타임스>에 훈장을 줄 유족을 찾는다는 작은 광고를 냈다. 광고가 워낙 작아 잘 보이지 않았는데 유족을 찾겠다기보다는 유족을 찾으려 노력했다는 기록을 남기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런데 <더타임스>가 광고를 토대로 한국 정부에서 베델 선생의 유족을 찾는다는 기사를 냈고 이를 본 베델 선생의 며느리 도러시 메리 베델 여사가 손녀 수전 제인과 손자 토머스 오언을 데리고 한국대사관에 왔다. 당시 이 가족은 정부 보조금으로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런던 특파원이었던 교민 박중희 씨가 가족을 직접 만나 1968년 7월 25일 중앙일보에 '항일의 필봉 베델'이라는 특집 기사로 한국에 생생히 알렸다.

 

몇 년 전 서울신문이 영국에서 선생의 생가를 찾은 바 있는데 보훈처, 외교부는 브리스톨 시청과 블루플라크(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알리고 기념하고 보존하기 위해 설치하는 표지판) 설치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가 한영 수교 140주년, 정전 70년을 맞는 뜻깊은 해여서 동상 건립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달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영국에 와서 선생의 손자를 만나 동상 건립 계획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계획하고 있다, 추진 중이다, 협의 중이다, 라는 말들보다 당장 지금도 늦었다며 서둘러 한 삽 뜨는 진짜 행동을 기다린다. 일찍 그렇게 대접해드려야 했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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