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만나는 런던-21
오아시스 이야기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의 동시 재림
역사를 바라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역사는 하나의 진실을 지니고 있지만, 그 하나의 진실은 수많은 시각을 가능케 한다. 역사는 하나의 열쇠를 지닌 문이지만, 수많은 출구로 향하는 마술의 문이다. 따라서 모든 역사 이야기는 하나의 시각과 하나의 출구를 이야기하는 한가지 방법일 뿐이다. 팝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팝이란 백 년도 살지 못한 지구상의 가장 젊은 음악이지만, 그 짧은 팝의 역사도 수많은 시각을 지닌 역사라는 이름의 ‘문’이다. 필자의 팝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의 출구를 경험한 한 남자의 한가지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야기 해두고 싶다. 본 연재에 등장하는 모든 팝의 역사에 대한 언급들은 한국 남자로서 사십 년 가까이 팝을 들어온 필자의 개인적인 방법이다. 한가지 더 밝혀두고 싶은 것은, 필자의 방법에는 영국, 미국이라는 팝 종주국들의 시각만을 믿지는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면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때로는 독자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개인적일 것이다.
팝은 60년대에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락(Rock)이라는 음악이 활짝 만개하며 이루어낸 업적이다.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크로스오버의 결과로 탄생한 락은 팝의 주도권을 장악하며 수많은 세부 장르들을 탄생시킨다. 수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지며 팝이 세계를 주도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려는 몸부림이 펼쳐진 시기가 60년대다. 70년대가 되면서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비틀스가 해체되고 봅 딜런은 커다란 교통사고를 경험하면서 한층 둔감해진다. 순수했던 60년대의 실험정신은 수그러 들고 대신 보다 대중적인 측면이 강조되거나, 펑크처럼 현실적이고 강렬한 음악이 등장하기도 하면서 60년대에 비해 단순해지는 특성을 지닌다. 80년대에 들어서는 매체의 급격한 발달이 이루어지며 형식적 음악이 팝의 대세를 이루게 된다. 뮤직 비디오가 일반화되고 팝의 유통구조를 위협하는 컴퓨터가 발달하게 된다. 전자음이 팝의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팝을 주도했던 것은 팝의 종주국 미국이 아니라 미국의 뿌리의 나라 영국이었다. 지구상의 최강국,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대한 양적인 규모를 지닌 미국을 능가했던 영국 음악의 위력은 팝의 관점에서 본다면, 놀라운 것이었다. 비틀스라는 팝 역사상 최고의 밴드가 등장했던 것 하나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불가사의다. 어떻게 조그만 나라 영국의 음악이 미국을 능가하는 위력을 발휘했을까? 쉽게는 미국의 전통음악인 컨트리 음악 같은 것이 영국에서 건너간 것임이 그 원인이겠지만, 어렵게는 영국이라는 나라가 지니고 있는 집중력과 섬세함의 결과였다고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뮤지컬의 양대 산맥인 뉴욕 브로드웨이와 런던 웨스트앤드의 차이점을 볼 줄 안다면 필자의 분석에 동의해 줄지도 모른다.
90년대가 되면서 팝의 주도권이 다시 미국으로 넘어갈만한 사건이 발생한다. 미국의 얼터 밴드 너바나(Nirvana)의 리더 커트 코베인의 권총 자살(93년)이다. 80년대에 얼터너티브 락이라는 장르가 만들어지는 것을 미술사의 매너리즘에 비유하고 싶다. 전통의 관습에 얽매인 락음악의 진부한 외투를 벗어 던진 것은, 르네상스의 관습을 벗어 던진 매너리즘과 유사한 혁명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코베인의 자살로 새로운 락 얼터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넘어가는 듯싶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새로운 형태의 락 음악이 등장하여 미국의 독주를 막게 된다. 그것이 바로 브릿팝(Britpop)이다. 60년대 영국 밴드들의 음악적 전통을 잇는 새로운 형태의 얼터너티브였다. 브릿팝의 대표적 밴드가 오아시스(Oasis)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노엘 갤러거라는 천재 뮤지션과 그의 동생 리암 갤러거에 의해 92년 영국의 터프한 도시 맨체스터에서 탄생한 오아시스는 비틀스의 전통을 재현하려는 영국 락의 욕망을 거침없이 터뜨려준 시대적 사명이었다. 그들의 음악은 섬세함과 거침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비틀스의 어여쁜 음악적 이미지를 지니면서도 롤링스톤스의 거친 반항적 풍모를 함께 지니고 있다. 그들의 음악은 죽은 커트 코베인이 거친 음악으로 움켜진 락의 주도권을 다시 분산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다왔지만, 갤러거 형제는 믹 재거나 키스 리차드를 능가하는 악동적 이미지를 발산하고 다녔다. 그들은 94년 <Cigarettes and Alcohol>, <Whatever> 두 곡의 주옥 같은 히트곡을 포함한 데뷰 앨범 <Definitely Maybe>를 영국 차트 넘버원에 올려 놓으며 성공하였다. Smiths나 Stone Roses 같은 영국의 선구적 얼터밴드들의 영향을 수용하며, 영국 락의 자랑스러운 일 세대들인 비틀스, 롤링스톤스, 더후, 킨크스, 스몰 페이시스 등의 영광을 재현하는 가장 영국적인 밴드로 자리 잡는다. 그들의 96년 히트곡 <Don’t Look Back in Anger>는 90년대 영국락을 대표하는 명곡이자 90년대 영국 젊은이들의 주제곡처럼 불렸던 노래다. 보컬이었던 동생 리암 대신 기타리스트이자 밴드의 메인 작곡가였던 실질적인 리더 형 노엘이 보컬을 맡은 이 곡은 영국 기성세대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1950년대 등장한 영국 문학의 이단아 <성난 젊은이들(Angry Youngman)>들의 대표적 극작가였던 존 오스본의 대표작 <Look Back in Anger>와 반대의 제목을 지녔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동양 철학의 사상적 배경을 지닌 듯한 이 곡의 가사는 단순히 성내고 반항하던 락음악 안의 젊음의 모습이 다분히 냉철해지고 보다 자기 성찰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아시스는 그들의 라이벌 블러(Blur)와 더불어 미국의 새로운 락에 밀려 고사 위기에 처한 영국 락의 전통을 지켜낸 영국 락사의 매우 의미 있는 밴드라고 할 수 있다. 비틀스와 롤링스톤스 즉 모범생과 악동을 모두 표현한 영국 락의 국보급 구원투수였던 셈이다. 섬세함 속에서 락의 아름다움을 찾아온 영국 락의 전통은 거칠고 강력한 미국 락과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하며 세계를 말아 먹고 있다.
글쓴이 최동훈은 카피라이터, 디자이너로 활동하였으며 광고 회사를 운영하였다.
어느날 런던에 매료된 그는 문화가 현대인을 올바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신념을 붙들고 런던을 소개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londonva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