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고 기자들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차기 교황에 대해 누가 좋은지 묻자 "내가 교황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교황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담은 합성 사진을 공개했다. 욕먹을 줄 알면서도 어쨌든 관심을 끌려는 트럼프다운 의도다. AI로 생성한 걸로 보이는 이 사진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교황이 입는 흰색 예복에 금색 십자가 목걸이, 금실로 장식된 흰색 모자를 쓰고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하늘 향해 위로 치켜들고 있다.
당연히 비난이 빗발쳤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톨릭 신앙을 조롱했다는 비난이다. “십계명을 모두 어긴 사람이 다음 교황으로 코스프레한 사진을 올렸다”, "재치 있거나 재미있는 점이 전혀 없습니다. 대통령님", "우파 세계의 리더가 광대 짓을 하고 돌아다닌다는 보여주는 이미지" 등 유명 정치인들까지 트럼프를 비난하고 나섰다. 물론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교황이나 가톨릭 신앙을 조롱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을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 1기 때부터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과 간혹 대립했다. 트럼프가 대선 공약으로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고 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벽만 세우려 하는 이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직격한 일이 대표 사건이다. 당시 트럼프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향해 “종교 지도자가 어떤 사람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수치”라고 반박했다.
그런데 이번에 사상 첫 미국인 교황이 나왔다. 레오 14세. 바티칸에서는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강력한 세속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점 때문에 미국인 출신 교황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본인도 “(내가 교황이 된다는 것은)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오랫동안 암묵적으로 존재한 미국인 교황의 금기를 깨고 ‘깜짝 선택’을 받은 거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나라에 큰 영광이다. 나는 교황 레오 14세를 만나길 고대한다”고 했다. 이 성급한 반응 또한 트럼프답다.
새 교황은 1891년 가톨릭교회 역사상 최초로 사회 문제만을 다룬 ‘노동헌장’ 회칙을 반포해 현대 가톨릭 사회교리의 초석을 놓은 레오 13세 교황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레오 14세’라는 교황 명을 선택했다.
레오 14세는 과거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과 부통령 JD 밴스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이력이 있다. 밴스 부통령이 "기독교인은 가까운 사람을 더 먼저 사랑해야 한다"며 이민자 단속의 정당성을 주장하자 교황은 "밴스는 틀렸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는 데 순위를 매기라고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새 교황은 첫 연설서 여러 갈래로 나뉜 교회에서 다리를 놓는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며 “다리 놓는 것이 벽 세우는 것보다 낫다”며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일까? 레오 14세 교황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새 교황은 페루 빈민가 등 중남미에서 오랫동안 사목한 이력으로 미국인 추기경 중 가장 덜 미국적이지만, <미국을 이해하고 미국에 말할 수 있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시대에 미국인 교황이 매우 중요하다>는 바티칸 내부로부터의 전언은 무척 의미 깊다.
헤럴드 김 종백
런던 코리아타운의 마지막 신문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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