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사진은 카메라로 찍고 인화를 해야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는 신중하게 찍어야만 필름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청년 시절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인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제게 카메라가 생겼습니다. 바라고 희망했던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메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자랑삼아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선 궁금하여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잘 찍혔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곳으로 가서 겉옷으로 빛을 차단하고 카메라 캡을 열어서 필름에 찍힌 모습을 보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어떠한 어둠에도 보이지 않았기에 희미한 빛으로 보려 시도했지만 결국은 실패했습니다.
멋진 사진들을 기대하며 인화소에 맡겼을 때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진이 검은색 바탕만 있을 뿐이지 어떠한 형태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카메라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었기에 고장인가 해서 그다음부터는 멀리하기 시작했던 흑 역사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 후로 사진에 대한 소망은 간절했습니다. 전화기와 사진과 현장에서 글을 올릴 수 있는 기기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을 때 지금의 스마트폰이 등장했습니다.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간절히 원했던 것을 과학자들도 느꼈기에 필요해 따른 기기를 만들어냈을 거라는 생각에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는 것은 개인 역사에 기록이 되기도 하며 사진에 그 당시에 느꼈던 감동과 감정을 담아 놓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그때의 받았던 감동, 그래서 그런 사진을 찍은 것이 남아 있어서 훗날 그 그림을 불러냅니다. 사진은 글이 되고 시가 되고 의미있는 인생의 발자국을 남기는 숭고한 역사가 됩니다.
존경하는 선배님들과 처음으로 작은 섬을 방문했습니다. 거제에 있는 <장사도 해상공원>입니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기에 갈매기 떼들이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습니다. 배를 타기 전에도 새우깡을 쌓아놓고 판매하기에 이곳 사람들은 새우깡을 좋아하는가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배 안에서도 새우깡을 판매했습니다. 실상 새우깡 같은 과자류는 갈매기에게 먹이로 주어서는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새우깡을 비싸게 판매하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먹기 위함이 아니라 갈매기의 먹이를 주기 위함입니다. 한 봉지를 비싸게 구매하여 갑판 위로 올라가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었습니다. 좀 미안한 감이 있습니다. 트랜스 지방 덩어리인 인공 과자를 먹여도 되는가 하는 의구심입니다. 좀 더 건강한 먹이가 없는지 물었으나 관계자는 한마디로 없다며 일축 했습니다.
장사도 해상공원은 신비로운 섬입니다. 마치 큰 바위얼굴을 형상해 놓은 ‘모아이’ 석상을 떠오르게 하는 얼굴 형상의 모형이 수십개가 관중석인 바다를 향해 바라보도록 제작했 놓았습니다. 모아이 석상은 약900개의 거대한 석상들이 태평양 외딴 곳에 위치한 칠레에 위치한 이스터섬에 산발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장사도 해상공원에 설치된 큰 얼굴은 바위가 아니라 현대적 감각으로 각종 기형학적으로 설치된 얼굴 형태입니다.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은 단순한 희망을 느끼게 합니다. 먼바다를 표정 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적들의 공격을 막기 위함의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새로운 곳을 향한 막역한 희망을 느끼게 합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개인적 사견일 뿐이지 역사적 의미가 부여된 것은 아닙니다.
장사도 해상공원의 큰 얼굴의 형상은 현대인들의 고뇌가 느껴지는 얼굴상입니다. 각종 기계의 쇠붙이로 얼굴 형태 안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조성모’ 가수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 상식적으로는 자아는 하나뿐입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인격의 자아는 하나뿐인데 내 속엔 나를 지배하려는 자아가 너무 많다 노래하는 것은 시대를 반영하는 풍자적 해석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안에 숨겨진 그늘, 그것이 어찌 그리 많은지, 예술품을 보면서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몸은 이곳에 있으나 마음과 생각은 다른 곳을 헤매기도 할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몸도 그곳, 마음도 그곳에 머물 수는 없는 것일까요? 직장에서는 직장에서 온 맘 다해 헌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책장을 펼치면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초당으로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의 천갈래, 만갈래 흩어진 생각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한 지인은 자신에게 닥친 질병으로 죽음의 직전에서 다시 새 생명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수 많은 것을 생각하고 분주하게 초단위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씩, 즉 스텝 바이 스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했습니다. 인생은 멀리 가야 할 장거리 마라톤과 같지만, 오늘 내가 딛고 걸어야 할 최소한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멀리 바라봐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지금 내가 처한 환경에 감사하고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결국 아직 오직 아니한 미래를 향한 지름길입니다.
박심원 목사
박심원 문학세계 http://seemwon.com
목사,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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