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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프로 선수의 팬이 되는 일은 멋진 일이다. 비록 그 선수는 팬 한 명 한 명의 존재를 알지 못하지만 애정을 갖고 한 선수를 오랫동안 멀리서 바라보는 일은 결코 허망한 일이 아니다. 특히 그 선수가 일취월장하는 것을 지켜보면 자식이 잘 커나가고 있는 것만큼이나 흐뭇하다. 필자에게는 신지애 프로 골퍼가 바로 그런 존재다.
 
신지애 선수의 경기를 보러 지난 8월 24일 12시간을 운전해서 스코틀랜드의 동쪽 해변가로 달려갔다. 골프의 발상지이자 세계 모든 골퍼들의 성지인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린 2024 AIG 위민스오픈 결승전 직관이 목적이었다. 새벽 5시 런던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신 선수의 성적은 2언더파로 10명이 올라오는 리더스 보드 톱 5에도 들지 못해 우승 가능성은 없는 듯했다. 넬리 코다와 찰리 헐 선수 둘이서 언더 8을 기록해 공동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열심히 운전해 올라가던 토요일 신 선수는 필자의 기대에 부응하듯 무려 5언더파를 기록해 도합 7 언더파로 6언더파의 릴리아 부를 한 타 차로 따돌리고 1등을 기록하고 있었다. 무려 7개의 버디와 2개의 보기를 한 결과다. 물론 필자가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두 달 전 경기표를 구매하고 2박3일의 여행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신 선수를 가까이에서 직관하려는 목적이었는데 신 선수가 우승 가능성이 있다니 하루 종일 따라다니는 것이 더욱 신이 나서 잠을 설칠 정도였다. 결국 한국계 선수인 리디아 고가 우승하긴 했지만 신 선수가 우승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던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었다.
 
필자와 신 선수와의 인연은 2008년 런던 근교 서닝데일 골프코스에서 열린 브리티시 여자오픈 우승에서 시작됐다. 당시 LPGA 소속도 아닌 정말 거의 무명의 신 선수가 한국 밖에서 이룬 첫 LPGA투어 우승이자 메이저대회 우승이었다. 신 선수는 2007년 KLPGA 우승자 자격으로 참가해서 LPGA 우승까지 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리고는 다음 해에야 비로소 LPGA 소속 선수가 되었으니 신 선수에게는 서닝데일에서의 우승이 정말 인생의 전환점이 된 셈이다.
 
당시 우연히 신 선수의 연습 장면부터 지켜보기 시작했다. 당시 시합에는 각종 시합에서 자격을 얻은 박세리·박인비·지은희 선수를 비롯해 23명의 한국 선수가 참가했었다. 정상적인 갤러리라면 이미 2001년에 같은 코스에서 우승한 박세리 선수를 따라다녀야 마땅했다. 하지만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는지 신 선수를 따라다니면서 지켜보게 되었고 덕분에 우승까지 가까이서 지켜보는 행운을 누렸다. 당시 연습장에서 제일 열심히 연습하는 신 선수가 눈에 띄어 말을 건 끝에 대화도 잠깐 나눴고 골프 모자에 사인을 받기도 했다. 당시 무명이었던 신 선수를 1번부터 18번홀까지 시종일관 따라다닌 유일한 한국인이 필자였다.
 
 
무명의 ‘스마일 퀸’이 보여준 초연함
 
당시 18번 홀을 마치고 우승하는 순간까지 신 선수는 한 번의 큰 실수도 없었다. 3차전에서 12언더파의 성적으로 결승전까지 올라와 마지막 날 9번홀까지 버디 3개를 잡으며 15언더파로 1등을 차지한 이후 끝까지 선두를 놓치지 않고 생애 첫 국제 시합 우승을 따냈다. 당시 4시간 이상을 따라다니면서 신 선수의 인간성에 매료되었다. 보기 하나 없이 버디 6개를 따내 결국 18언더파로 대만의 쩡야니 선수를 3타 차로 제치고 우승을 하는 동안 ‘스마일 퀸’이라는 별명이 부끄럽지 않게 한순간도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공이 깊은 풀숲에 떨어져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긴장의 표정 하나 없이 담담하고 가볍게 쳐냈다. 과연 어떤 심성을 가졌길래 20살의 어린 나이에 저렇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나중에야 그 웃음이 비극적인 가족사를 이겨낸 웃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정말 한참 충격에 빠졌었다.
 
신 선수의 그런 무심함과 초연함은 나중에 언론 보도에 나온 신 선수의 가족사를 알게 되면서 이해가 되었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숨과 맞바꾼 돈으로 골프를 하게 된 신 선수에게 세계 무대 우승은 앞으로를 예고한 그냥 ‘첫우승’이었을지 모른다. 첫 우승은 단순한 시작에 불과하고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각오가 당시 신 선수의 마음속에 오고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선수의 우승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극소수의 한국 관중들 중 아무도 태극기를 가지고 온 사람이 없어서 결국 필자 일행이 가지고 있던 태극기 스카프가 동원되기도 했다. 당시 신 선수의 우승 장면을 보면 그 태극기를 든 신 선수의 모습이 보인다.
 
당시 20세였던 신 선수는 실제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박세리 선수가 26살인 2003년에 세운 브리티시 여자오픈 최연소 기록도 갈아치우고, LPGA 멤버가 된 다음해에는 역대 최연소 상금왕과 신인왕까지 거머쥐었다. 깜짝 등장으로 세계 골프계를 놀라게 한 불과 2년 뒤인 2010년 세계 랭킹 1위에 올라서는 쾌거를 이루었다. 아시아인으로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건 신지애가 처음이었다. 신 선수의 우상이던 박세리 선수도 못해 본 영광이었다. 이후 신 선수는 연이은 부상과 함께 모두들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깊은 슬럼프에 빠졌지만 2012년 자신의 국제 시합 우승 첫무대였던 브리티시오픈에서 박인비 선수를 무려 9타 차로 밀어내고 다시 우승하며 재기한다.
 
 
선수들 괴롭힌 올드코스의 날씨
 
지난 8월 25일 AIG 위민스오픈 결승전 날, 필자는 신 선수를 이번에도 1번 홀부터 18번홀까지 따라다녔다. 신 선수는 1타 차로 2위를 기록한 베트남 출신 미국 선수 릴리아 부와 파트너가 되어서 오후 2시15분에 결승전을 시작했다. 익히 여러 번 겪어 본 올드코스의 날씨지만 그날은 정말 대단했다. 강풍을 동반한 세찬 비바람은 아니었지만 쨍하게 햇빛이 나다가 금방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등 시합 내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했다. 올드코스 경기는 골프선수들끼리의 시합이 아니라 날씨와 온도와의 싸움이라는 말이 맞는 듯했다.
 
이날 시합에서 신 선수는 전날 3차전에서 보여줬던 7개 버디 같은 신기 들린 듯한 플레이는 보여주지 못했다. 이상하게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다. 동반 경기를 하던 부 선수도 잘 안 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65㎝의 우람한 체격인 부 선수가 쳐내는 티샷은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인 157㎝의 신 선수보다 항상 30~40야드는 더 나갔다. 신 선수가 스트레스를 받을 만도 했으나 이미 신체조건으로 인한 차이는 익숙해져 있는 듯했다.
 
이날 선수들은 변화무쌍한 날씨의 변덕에 맞추어 낮게 볼을 쳤고, 강하게 때리지도 않았다. 물론 올드코스 특유의 벙커와 러프, 좁은 페어웨이 등을 감안하면 파크랜드 코스에서 거리를 내려고 후려치는 식의 경기를 올드코스에서는 하지 않는 법이다. 원래 ‘몸조심’을 상당히  해야 하는데 그날은 강풍까지 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공은 깊은 벙커로 자주 굴러 들어갔다. 제니 신은 유명한 나카지마 벙커에 공이 빠지면서 보기를 기록하기도 했다.
 
신 선수도 12번 홀에서 결국 티샷이 벙커에 빠졌다. 그러나 침착하게 탈출했다. 그러나 빼낸 공은 옆으로 나와서 그린 30야드 거리에 떨어졌다. 여기서 신 선수가 신기를 보였다. 공과 홀 사이는 그린이 아닌 굴곡이 몇 개나 있는 페어웨이였다. 당연히 어프로치샷을 할 줄 알았는데 신 선수는 퍼트를 잡는 것이 아닌가? 신 선수는 침착하게 머리를 박고 퍼터로 공을 굴려 홀컵 근처로 보내 쉽게 파를 잡아 점수를 잃지 않았다. 굴곡이 몇 개나 있는 곳에서 어프로치샷을 안 하고 퍼터를 쓴 신 선수에게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올드코스와 관계되는 수많은 말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최고는 현존하는 골프의 신 잭 니콜라우스가 한 말이다. “세상의 수많은 프로 골퍼들을 둘로 가른다면 올드코스에서 우승한 선수와 못한 선수로 가를 수 있다.” 그만큼 올드코스에서 우승하는 것이 힘들다는 얘기다. 
 
올드코스의 날씨에 관한 얘기라면 국가대항 골프 시합이었던 던힐컵 시합에 참가했던 한국 선수들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986년에 열렸던 2회 던힐컵에는 대만이 국기 문제로 참가를 거부한 덕분에 한국에서 당시 최고의 선수로 꼽혔던 최상호·최윤수·조호상 선수가 갑자기 참가하게 됐다. 이들은 한국 프로 골퍼로서는 최초로 동남아 밖 국제시합에 처음 참가했다. 해서 올드코스의 특성은커녕 스코틀랜드 링크스 코스의 악명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한국 남자 선수들의 쓰라린 경험담
 
1차전에서 이들은 일본 팀과 붙어서 3 대 0으로 패하고 하루 만에 시합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당시 1차전에서 탈락하고 런던으로 온 한국 선수들을 런던 주재 한국 기업 지사장들이 한인타운에 위치한 유대인 골프클럽 쿰힐에 초대해서 라운딩할 기회를 가졌다. 그때 들은 선수들의 올드코스 경험담은 인상적이었다. 한 선수에 따르면 대회 측에서 붙여준 캐디와 같이 라운딩을 하던 중 페어웨이에 바람이 강하게 부는 가운데 거리를 내겠다는 욕심에 3번 우드를 요구하자 캐디가 고개를 흔들었다고 했다. 캐디는 우드 대신 3번 아이언을 건네주면서 낮게 치라고 했다고 한다. 세팅을 하자 다시 바람을 감안해 45도 각도로 서라는 믿기 힘든 조언을 했고 캐디가 가르쳐 주는 방향으로 아이언을 때렸더니 강풍을 타고 그린에 안착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5번 그린에서의 경험담도 독특했다. 이 그린은 넓이가 무려 3만8000제곱피트에 이른다. 평수로 환산하면 1067평(약 3530㎡)이어서 상상도 잘 안되는 넓이다. 여기서 최상호 선수가 거의 엣지에 붙은 공을 퍼팅을 하려고 하자 캐디가 좀 놀리는 투로 “너 프로 선수 맞냐”고 묻더라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는 투의 표정을 지으니 캐디가 “저 100야드(91.5m) 거리를 퍼터로 치려고 하느냐”면서 “굴곡이 심한 그린에서는 어프로치 클럽이 쉽지 않은가”라고 조언하면서 어프로치 클럽을 주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린에서 어프로치를 써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기가 막하다는 투로 “그린에서는 그린만 상하지 않는다면 드라이버로 쳐도 상관없다. 당신이 한국 대표 프로라면서 그린을 상하지 않게 볼만 칠 수 있는 능력도 없는가”라고 놀렸다고 했다. 당시 한국 선수들은 그린에서 어떤 클럽이든 다 쓸 수 있다는 규칙을 몰랐다고 했다. 사실 골프 코스 어디서건 어떤 클럽으로 쳐도 무방하다는 것이 골프의 규칙이다. 그래서 파 3홀에서 티샷을 퍼터로 하는 사람도 있고, 그린에서 재미로 드라이버를 쓰는 골퍼도 영국 골프 코스에선 가끔 볼 수 있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 코스인 올드코스는 정말 세상 어느 코스와도 비슷하지 않다. 그래서 잭 니콜라우스의 말에 아직까지 누구도 감히 시비를 걸지 못한다. 올드코스를 정말 올드코스답게 만드는 것은 바람과 비가 같이 오는 날씨와 8월 말에도 털모자와 방한복을 입어야 하는 온도, 그리고 페어웨이 중간에 악마처럼 입을 벌리고 깊은 지옥 속으로 공을 초대하는 항아리 벙커, 그리고 끝에서 끝까지 거의 100m가 되는 그린 등이다. 그 그린에는 골퍼들에게는 히말라야산맥보다 더 높은 공포의 굴곡이 존재한다. 이번 결승전에서도 5연승을 한 세계 최고의 고수 넬리 코다가 14번 홀에서 순식간에 더블보기로 무너져 결국 회복을 못 하고 2등에 그치고 만 것도 올드코스의 모든 악조건이 만들어낸 결과다. 모든 골퍼를 울리는 이런 악조건이 있어 올드코스는 올드코스답고 그래서 독특하고 유일한 코스이다.
 
 
 
신중함이 만들어낸 마지막 홀 버디 
 
18홀을 도는 동안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표정도 짓지 않던 릴리아 부와 항상 얼굴에 웃음을 띠던 신지애는 정말 대조적인 경기 동반자였다. 신지애는 연습 스윙과 퍼팅샷을 하기 전 앞뒤로 다니면서 그린을 재고 또 쟀다. 애정을 가지고 따라다니는 관객의 입장에서 봐도 짜증이 날 정도로 신중했다. 왕년의 영국 골프 전설이었던 닉 팔도도 샷 전 시간 끌기로 유명하다. 그런 신지애의 신중함은 18번 홀에서 거의 불가능한 버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신 선수는 세컨드샷을 홀컵에서 4m 거리에 가져다 놓았다. 거의 버디가 불가능한 거리라고 봐야 정상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신 선수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이미 물건너간 우승임에도 불구하고 등수에 관계없이 신중하게 그린을 살폈다. 그리고는 홀컵을 향해 퍼터를 밀었고 공은 홀로 빨려들듯 들어갔다. 이어서 신 선수는 지금까지 어느 홀에서도 보여주지 않던 환호를 했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높게 치켜들고는 관중석의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흡사 우승을 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 퍼팅 하나로 3등이 아닌 2등을 했다는 안도감은 아닌 듯했다. 별 쓸모없는 마지막 샷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결과를 이뤄냈다는 사실이 기뻤던 듯했다.
 
반면 릴리아 부는 짧은 퍼팅을 실패하면서 보기를 하고 말았다. 부모가 베트남에서 목숨을 걸고 보트로 탈출해와 딸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부와, 어머니의 목숨과 바꾼 돈으로 골프를 시작해 36살임에도 아직 건재한 신지애의 삶이 묘하게 겹쳐지는 18번 홀은 인생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신지애 선수를 따라다닌 위민스오픈에서 개인적인 유감은 신 선수가 2008년 서닝데일 코스에서 우승할 때 사인 받아 놓은 골프모자를 깜빡하고 안 가지고 갔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사인을 연이어 못 받고 말았다. 내년 웨일스 시합에 신 선수가 다시 출전하면 코스 자원봉사자라도 해서 사인받을 기회를 만들어야겠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여왕은 떠나고 총리는 바뀐다 <영국 왕실+정치 편> (2024) 핫하고 힙한 영국(2022),
       두터운 유럽(2021), 유럽문화탐사(2015),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영국인 발견(2010)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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