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축구에는 재미있는 말들이 많다. 가장 유명한 말은 리버풀 전설의 감독 빌 샹클리가 남겼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가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런 태도에 대단히 화가 납니다. 나는 축구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고 당신에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Some people believe football is a matter of life and death, I am very disappointed with that attitude. I can assure you it is much, much more important than that.)” 영국인에게 축구는 그렇게 중요하다는 걸 진짜 강조하고 싶어 한 말이다.
그다음이 영국 축구의 또 다른 전설 게리 리네커 선수가 한 말이다. 그는 1964년에 시작돼 지금도 영국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해설 프로그램으로 평가받는 BBC의 ‘매치 오브 더 데이(MOTD: Match of the Day)’ 해설을 1999년부터 맡고 있다. 그는 “축구는 간단한 게임이다. 22명이 공 하나를 90분 쫓아다니다가 결국은 독일이 항상 이기는 게임이다(Football is a simple game. Twenty-two men chase a ball for 90 minutes and at the end, the Germans always win)”라고 해서 세계 축구팬들을 웃겼다. 하긴 그 말을 하던 당시만 해도 ‘독일이 항상 이기는 게임’은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독일이 한국에 2 대 0으로 지자 리네커는 “독일이 가끔 지기도 한다(the German sometimes lose)”라고 말을 바꾸었다.
이 축구 명언에 이제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 속담을 차용한 “토트넘 팬들은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라는 말이다. 지난 5월 14일 토트넘 구장에서 열린 홈팀 토트넘과 맨시티의 경기에서 상식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날 토트넘 팬들은 토트넘이 지기를 바라는 응원을 했다. 토트넘이 맨시티를 이기면 EPL 4위를 달성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경기였는데도 말이다. 모든 유럽 축구 클럽과 팬들이 꿈꾸는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아주 중요한 경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토트넘 팬들은 자신의 팀이 맨시티에 지기를 바랐다.
지기를 원한 토트넘 팬들의 괴기한 응원
토트넘 팬들이 세계 스포츠 역사상 초유의 응원전을 벌인 이유는 간단하다. 그날 토트넘이 맨시티를 이기면 천하의 숙적인 아스날이 20년 만에 프리미어리그(EPL)에서 우승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스날은 맨시티와 1·2위를 다투고 있었다. 토트넘 팬들은 자신들이 4등을 못해 챔피언스리그에 못 나가도 아스날이 EPL에서 우승하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는 심정이었다. 실제 맨시티와 시합 전 데일리메일이 소셜미디어 X를 통해 토트넘 팬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해봤더니 놀랍게도 무려 52%의 토트넘 팬이 토트넘이 지기를 바란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실 EPL 클럽들에 있어 4위 안에 든다는 건 로또를 타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EPL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해 첫 단계 시합만 해도 승부와 관계없이 500만유로(약 73억원)를 받는다. 그리고 2차 단계인 그룹 스테이지로 가면 무조건 1564만유로(약 230억원)를 받는 등 올라가면 갈수록 돈벼락을 맞는다. 최종 승리를 하면 거의 8000만유로(약 1179억원)라는 엄청난 돈이 클럽으로 굴러 들어와 클럽 살림이 확 피는데도 불구하고 토트넘 팬들은 이날 기괴한 응원전을 벌였다.
물론 토트넘의 엔지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토트넘 팬 100%가 비록 아스날에 EPL 승리가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토트넘의 승리를 원한다”고 강조하긴 했다. 그러면서 “패배를 원하는 일은 스포츠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2023년 토트넘 감독으로 오기 전 세계 축구 라이벌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사이라는 스코틀랜드 리그의 두 강자 셀틱과 레인저스 중에서 셀틱 감독을 맡았었다. 그 역시 숙적 클럽 팬들의 라이벌 의식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스포츠 정신과 원칙을 말한 셈이다.
골 먹자 “아스날 보고 있나” 함성
홈구장에서 열린 당일 경기에서는 외국인 눈으로는 괴상한 일들이 실제 많이 벌어졌다. 예컨대 맨시티의 볼이 토트넘 골망을 흔들었을 때 토트넘 팬들 사이에서는 “아스날 보고 있나?(Are you watching Arsenal?)”라는 기쁨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아무리 아스날이 미워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의아해할 만한 일이 버젓이 벌어진 것이다. 더욱이 이런 광경은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중계되면서 세계 축구팬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챔피언스리그에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사라져 클럽이 수백~수천억원의 손해를 보더라도 결코 숙적 아스날이 EPL 우승을 하는 건 볼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자학’의 태도였다.
이날 후반 41분 손흥민이 골키퍼와 1 대 1의 찬스를 잡아 동점의 기회가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같으면 토트넘 관중석에서 환호가 터져나올 법했는데 그 반대였다. 오히려 손흥민이 찬 공이 맨시티 골키퍼에게 막히자 토트넘 팬들 사이에서는 안도의 한숨소리가 나왔다. 그리고는 토트넘 팬들의 희망대로 맨시티에 2 대 0으로 지고 말았다. 토트넘의 4등과 함께 아스날의 20년 만의 EPL 우승 희망도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평소 같으면 손흥민에 대한 토트넘 팬들의 비난이 하늘을 찔렀겠지만 오히려 이날은 칭찬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대노하면서 토트넘 팬들을 비난했지만 그래도 토트넘 팬들의 하늘을 찌르는 기분은 막을 수 없었다.
물론 토트넘 팬들의 이런 심정은 이해할 만하다. 토트넘은 비록 EPL에서 강등당해 본 적은 없지만 한 번도 우승을 해본 적이 없는 팀이다. 준우승도 손흥민이 와서 해리 케인과 손발을 잘 맞춘 덕분에 2016~2017년 시즌에 한 번밖에 못했다. 반면 아스날은 이미 3번이나 우승을 한 적이 있고, 준우승도 8번이나 한 팀이다. 그런데 이번에 또 우승을 하면 정말 토트넘 팬들은 자다가도 화가 나서 속이 뒤집어질 판이었다. 아스날은 더군다나 2003~2004 우승 때는 아르센 벵거 감독과 전설의 티에리 앙리의 활약으로 무패의 우승을 차지했다. 토트넘 팬들의 열등감과 시기심도 이해할 법하다.
이방인의 눈과 귀로 보고 듣자면 두 클럽 팬들이 경기 때 서로 주고받는 응원가는 솔직히 말해 저열하고 유치하다. 보통의 인내를 갖고는 듣기 힘들 정도다. 내가 먹을 밥이지만 너도 못 먹게 독을 푼다는 정도의 라이벌 의식이 넘쳐 흐른다. 두 클럽이 원수가 된 이유는 클럽 간 거리가 6㎞로 가깝다는 사실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지기를 바라고 지고 나자 잘했다고 칭찬하는 괴기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노동자 VS 학생, 출발부터 달라
아스날은 클럽 표식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포를 비롯한 무기를 만드는 공장 종업원들이 1886년 만든 클럽이다. 그래서 별명도 총을 뜻하는 ‘더 거너스(The Gunners)’다. 거기서 더 변형되어 ‘구너스(Gooners)’로 불리기도 한다. 거기에 비해 토트넘은 1882년 토트넘 그래머 스쿨이라는 엘리트 공립중학교 학생들이 만든 클럽에서 시작되었다. 훨씬 지적인 클럽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역사적 배경도 두 클럽의 경쟁의식에 잠재되어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자학과 자폭을 할 정도는 아니다.
두 클럽이 경기를 할 때 입장권은 공식 가격이 평소의 두 배이고 암표는 거의 부르는 것이 값이다. 1년에 두 번 치러지는 두 클럽 간 경기는 정말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차서 거의 축제 같은 분위기가 펼쳐진다. 물론 팬들은 원수를 대하는 구호나 응원가 등을 외치거나 부르지만 결국 서로 놀리거나 비난하는 재미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를 자극하려고 일부러 상대를 모욕하는 자신들만의 노래를 부르고 낄낄거린다. 영국 축구 클럽 간 숙적 관계는 대부분 이렇게 재미와 장난기를 섞어 즐겁자는 정도로 그친다. 그러나 영국 스코틀랜드 리그의 최강자인 셀틱과 레인저스 두 클럽 간 관계는 좀 다르다. 실제 과거에 피가 튀고 살인까지 벌어졌던 진짜 숙적 관계이다.
스코틀랜드 제1의 도시인 글래스고에 같이 위치한 셀틱과 레인저스 사이의 숙적 관계는 영국 축구클럽 중에서도 가장 오래됐고 역사적 사연도 있다. 영국 축구 클럽의 라이벌 리스트에는 항상 이 두 클럽 관계가 제일 첫 순위에 오른다. 오죽했으면 2023~2024년 시즌 원정 경기 때는 방문 팀 팬의 지정 좌석을 완전히 없애서 같이 응원을 못하게 막았다. 물론 개인적으로 표를 구해 여기저기에 앉아 응원하는 건 막을 수 없었지만 클럽에 공식적으로 표를 배당해 나누어 주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2024~2025년 시즌부터는 다시 좌석의 5%인 2500~3000장의 표를 배당해 준다는 사실이 뉴스로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그 정도로 두 클럽 팬들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감돈다.
살인까지 벌어진 숙적, 셀틱 VS 레인저스
올드펌 더비(Old Firms Derby)라고 불리는 두 클럽 간의 경기가 열리는 주말이면 글래스고 경찰들은 총비상이다. 평소에 비해 무려 9배나 많은 폭력사고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과거에는 두 클럽 팬들 사이에 싸움도 다반사였고 살인사건도 빈번했다. 사실 EPL 경기에서 클럽 지정석이 아닌 일반석에는 주변과는 다른 클럽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섞여 앉아 경기를 보는 일이 드물지 않다. 그러나 올드펌 더비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현재는 드러내 놓고 상대팀이 신봉하는 종교를 믿는 선수를 뽑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꺼리는 건 사실이다. 레인저스는 가톨릭 신자 선수는 절대 뽑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과거에는 분명히 있었다.
두 클럽은 모든 면에서 반대 요소를 가지고 있어 팬들 사이에는 태평양보다도 깊은 간격이 있다. 셀틱의 가톨릭, 공화국파(Republican), 노동당, 아일랜드라는 배경과 레인저스의 개신교, 왕당파(Loyalist), 스코티시계 북아일랜드라는 배경을 간단하게 비교해 보아도 두 팀이 왜 숙적 관계인지를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이런 관계는 북아일랜드의 두 종교와 민족 간의 분쟁인 더트러블(The Trouble)로 더욱 악화된 면이 분명 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논쟁주제가 정치와 종교인데 올드펌 더비에는 인종과 국가 문제까지 겹쳐 있으니 두 클럽 간에는 절대 양보라는 건 없다. 이를 일러 종파주의(sectarianism)와 원주민 대 이민자 사이의 긴장(Native-Immigrant tension)이라고도 한다.
셀틱은 아일랜드에서 이민온 아일랜드인들이 가톨릭 성당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클럽이다. 클럽 표징에서 나오는 네잎클로버가 아일랜드의 상징이듯 바로 셀틱의 뿌리가 아일랜드임을 알려준다. 홈경기 유니폼도 아일랜드의 상징인 초록색 일색이다. 반면 레인저스 클럽 표징 중앙에는 영국의 상징인 붉은 사자 그림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두 클럽 팬들이 응원할 때는 절대 스코틀랜드 국기는 흔들지 않는다. 셀틱팬은 아일랜드 깃발, 레인저스팬은 유니언잭을 반드시 휘두른다.
두 클럽은 주요 리그 시합에서만 440회를 맞붙어서 레인저스가 169회, 셀틱이 168회를 각각 이겼다. 나머지 103회는 비겼다. 그래서 누가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둘도 없는 호적수다. 해서 두 클럽 간의 경쟁의식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다. 당연히 두 클럽 사이의 경기는 경고와 퇴장이 다반사이고 부상자가 속출한다. 해외 선수들이 이 두 클럽을 비롯한 스코티시 리그에서 투지와 몸싸움을 배운 후 EPL로 진출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한 경로로 꼽힌다. 한국 선수 중 기성용 선수가 셀틱에서 몸싸움을 잘 배워서 EPL(스완지, 선덜랜드, 뉴캐슬)에서 오랫동안 활약했었다. 차두리 선수도 셀틱에서 2년간 뛴 적이 있다. 현재 오현규와 양현준 선수가 셀틱에서 2023년 후반부터 뛰고 있고, 권혁규 선수는 셀틱에서 샌트 미렌으로 대여 가서 뛰고 있다.
영국 축구 클럽들 사이의 숙적 관계 리스트에서 항상 제일 먼저 나오는 셀틱과 레인저스 다음으로는 타인웨어 더비의 뉴캐슬과 선덜랜드, 세컨드시티 더비의 아스턴빌라와 버밍엄시티 등의 순서로 나온다. 그리고는 노스런던 더비의 토트넘과 아스날이 등장하고 다음이 머지사이드 더비의 에버턴과 리버풀, 사우스웨일스 더비의 카디프시티와 스완지시티, 맨시티와 맨유 등이 뒤를 잇는다.
꼬이고 꼬인 숙적 관계
사실 영국 클럽 팬들을 상대로 조사된 숙적 관계는 일반적으로 아는 것과는 다른 점도 많다. 예를 들면 맨시티와 맨유가 맨체스터 더비로 같은 시에 있으니 라이벌 의식이 강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맨시티 팬 79%, 맨유 팬 88%가 리버풀을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라고 여긴다. 그러면 리버풀은 어떤가? 리버풀 팬 84%가 맨유를 라이벌이라고 여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실 맨시티가 지난 5월 19일 EPL 2023~2024년도 최종 승자가 되어 EPL 32년 역사상 처음으로 4연승을 하는 대기록을 세우긴 했지만 맨시티는 ‘어린’ 팀이다. 맨시티가 EPL로 승격된 건 1880년 창설 이후 120년 만인 2000년이었을 정도로 과거에는 약체 클럽이었다. 해서 전통의 강호 맨유와 리버풀 팬들이 자신들과 괄목상대할 클럽은 결코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중동의 오일머니로 만들어진 졸부 클럽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토트넘 팬 87%, 아스날 팬 87%는 상대를 라이벌로 본다. 두 클럽 팬들의 눈에는 다른 팀은 전혀 안 보이고 오로지 상대만 보인다. 반면 ‘머지사이드 더비’라고 불리지만 리버풀과 에버턴 사이에서 정작 리버풀 팬들은 에버턴을 라이벌로 보지 않는다. 에버턴 팬 86%는 리버풀을 라이벌로 보는 반면 리버풀 팬은 38%만 에버턴을 라이벌로 보고 84%는 바로 이웃 도시 맨유를 라이벌로 여긴다. 리버풀 팬도 에버턴을 자신들의 상대가 안 된다고 보는 셈이다.
하긴 2022~2023년도에 에버턴은 17등을 해서 겨우 강등권(18~20등) 바로 위에 있었고, 리버풀은 5위를 했으니 깔볼 만하다. 또 최근 끝난 2023~2024년도 시즌에서도 리버풀은 3위, 에버턴은 15위를 차지했다. 에버턴은 EPL 32년 역사상 한 번도 강등당하지 않은 6개 강호(맨유, 아스날, 첼시, 리버풀, 토트넘) 중 하나이면서도 6개 강호 중 토트넘과 함께 한 번도 EPL 우승을 못 해본 팀이기도 하다.
비록 리버풀 팬이 에버턴을 라이벌이라고 여기지 않지만 서로 홈구장이 엄청 가깝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라이벌이라고 여긴다. 리버풀이 에버턴을 무시하지만 그래서라도 에버턴과 붙으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 운명이다. 그러나 리버풀 입장에서는 유감스럽게도 2023~2024년도에 두 번 붙어서 2대0을 한 번씩 주고 받았다. 사실 리버풀 클럽이 리버풀에 있으니 더 정통의 리버풀 클럽 같지만 사실 리버풀은 에버턴(1878년 창설)에서 갈라져 나온 팀이다. 내부 갈등으로 1892년 갈라져 나온 후배 클럽이라 역사적으로도 라이벌일 수밖에 없다.
영국 클럽들이 라이벌이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부분 지리적 이유로 시작된다. 지리적인 이유로 팬들이 서로 부딪치는 게 가장 크다. 북부런던 더비의 아스날과 토트넘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둘 다 북부런던에 경기장이 위치하고 있다. 머지사이드 더비의 리버풀과 에버턴의 홈구장은 영국 축구클럽 중 서로 가장 가깝다. 1㎞ 정도 떨어진 두 클럽 홈구장에서 동시에 시합이 열릴 때 중간에 서 있으면 고함소리에 귀가 먹먹할 정도다.
이름·부모는 바꿔도 축구클럽은 안 바꾼다
런던에는 현재 7개의 EPL 소속 축구클럽이 있다. 토트넘, 아스날, 첼시, 크리스털팰리스, 풀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브렌트퍼드 등이다. 그래서 이 팀들끼리 붙을 때는 모두 런던 더비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들 중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클럽 간 더비는 이번에 세계적 화제를 불러일으킨 토트넘과 아스날의 북부런던 더비이다. 이 북부런던 더비와 관련해 필자는 큰 위기를 겪을 뻔한 적이 있다. 지난해 12월 31일 토트넘 구장에서 벌어진 본머스와의 홈경기에 갈 기회가 있었다. 점심과 다과까지 제공되는 무려 60만원이 넘는 특별석이었다. 마침 그날 71분에 터진 손흥민의 폭탄 같은 골을 직관하고, 결국 토트넘이 3 대 1로 이긴 기분 좋은 경기였다. 그런데 중간 휴식 시간 토트넘 팬들과 담소를 나누던 중 “사실 나는 아스날 팬인데 우리 동포 손흥민 선수 때문에 지금은 임시로 토트넘 팬이다”라고 토로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순간 머리가 허연 노인 둘의 표정은 정말 똥 씹은 표정이었다. 그 노인의 다음 말은 “어떻게 그렇게?(How Come?)”였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었다. 그 말과 표정은 도저히 잊어버릴 수가 없다. 자신의 이름이나 부모는 바꾸어도 축구클럽은 절대 바꾸지 않는다는 영국 축구팬에게 나는 국가도 쉽게 배반하는 매국노 취급을 당한 셈이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여왕은 떠나고 총리는 바뀐다 <영국 왕실+정치 편> (2024) 핫하고 힙한 영국(2022),
두터운 유럽(2021), 유럽문화탐사(2015),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영국인 발견(2010)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