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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역사에서는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배워야 할 교훈이 있는 법이다. 1885년에 벌어졌던 거문도사건도 마찬가지다. 역사 교과서에 한두 줄 겨우 등장하고 지나가는 사건이지만 지금의 한반도 주변 정세나 한국의 처지가 그때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정말 많은 교훈이 거문도사건을 들여다볼 때마다 새록새록 되새겨진다.
 
거문도는 한반도 남해안 여수와 제주도 사이의 중간쯤에 위치한 크기 12km2 의 조그만 섬이다. 그런데 극동 바다 구석에 있는 이 낙도가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85년 세계 뉴스의 초점으로 등장했다. 거문도는 물론 조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에 말이다. 바로 우리가 ‘거문도사건’이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Port Hamilton Incident’ 혹은 ‘The British Occupation of Komundo’라고 기록된 영국 해군의 조선령 거문도 점령사건 때문이다. 영국 해군은 1885년 4월 15일부터 1887년 2월 27일까지 거의 2년간 거문도를 자신들 멋대로 ‘해밀턴 항구’라고 부르면서 조선의 양해나 동의 없이 무력으로 강점해 주둔했다.
 
거문도는 당시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남진하려던 러시아의 목줄을 쥘 수 있는 천혜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은 거문도를 강점했다. 이미 1866년 프랑스와 병인양요로, 1871년 미국과 신미양요로 결전을 해 본 조선 정부는 남해의 조그만 섬 때문에 당시 거의 누구도 대적이 불가능했던 영국 해군과 일전을 겨룰 능력도, 이유도, 의욕도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땅에서 일어난 일을 그냥 구경꾼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은 어차피 싸움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이미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주변국가들의 싸움에 무감각해지고 익숙해져서 그냥 보고 있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던 처량한 신세였다.
 
당시 거문도는 군사전략상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열강들이 탐을 내는 섬이었다. 영국 해군은 거문도를 ‘동부 아시아의 주요 전쟁터(The cockpit of Eastern Asia)’로 칭했고,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미국 전권대사 하순 슈펠트는 거문도를 ‘동쪽의 지브롤터(이베리아반도 남단의, 지중해로 들어가는 해협 길목의 작은 영국 영토)’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영국은 1861년 이미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 1차 목표인 원산(당시 러시아는 원산을 라자레프항(port of Lazaref)이라고 불렀다)에 대한 염려와 함께 대마도가 러시아의 손에 다시 떨어졌을 때를 걱정하고 있었다.(이미 러시아는 1861년 3월부터 6개월간 대마도 항구 사용을 요구하며 버티다가 영국의 개입으로 철수한 일이 있었다. 물론 영국도 1859년 대마도 근처를 수주 동안 정밀조사하고 다녀서 일본을 자극한 일도 있긴 했다.)
 
이런 일련의 사태가 있기 훨씬 전인 1845년 영국은 사마랑(Samarang)함 선대(船隊)의 에드워드 벌처 제독에게 거문도 조사를 명한다. 선대는 바로 거문도와 인근을 샅샅이 조사했고 심지어는 거문도항에 정박하면서 주민 성향까지 파악해 보고했다. 물론 영국이 이를 조선 조정에 사전 통보했다는 영국 측 기록도 없고, 조선 조정에 거문도로부터의 보고가 있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없다. 단지 영국 해군이 남긴 기록들에 의해 ‘조선 영토에 대한 외국 군대의 일방적인 첫 무단 순방’으로 역사에 기억될 뿐이다.
 
영국은 조사 이후 조선에서 이 작은 섬은 무엇으로 부르든지 상관하지 않고 당시 해군성 장관 조지 해밀턴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이라고 명명해 놓고 유사시 점령을 위한 작전계획까지 수립했다. 그리고는 정확하게 30년 뒤 실제 거문도를 강점해 버린 것이다. 보통 영국 해군의 거문도 강점이 러시아와 중동에서 벌어진 사태에 따른 세력 균형을 맞추려고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처럼 이해를 하지만 영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만일을 대비해 착실하게 거문도 강점을 준비해 온 것이다. 실제 1877년 홍콩에 주둔한 영국 해군 중국본부(China Station) 본부장이었던 라이더 제독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하는 무역을 보호하기 위한 해군 거점으로 거문도 항구를 점령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거문도사건을 6개월도 안 남긴 1884년 12월 영국 해군은 메를린함 선장 레지날드 캐리-브랜톤 대위를 시켜 거문도를 다시 상세하게 조사했다. 당시 보고서에는 고도, 동도, 서도 등 거문도를 이루는 세 섬의 지리적인 개요뿐 아니라 주민들의 성향까지도 기록돼 있다. 보고서는 ‘거문도에 사는 수백 명(당시 조선 기록에는 2000여명)의 어부와 농부들은 아무런 정치적 견해도 갖고 있지 않고 자신들이 조용하고 평화롭게 생선을 잡고 쌀로 밥을 지으며 살 수만 있다면 (우리가 점령을 해도) 아마도 계속해서 그럴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거문도사건은 지금까지도 ‘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라고 불리는 당시 열강 영국과 러시아의 식민지 영토 확장 야욕이 빚어낸 거의 한세기에 걸친 다툼의 파편을 조선이 지정학적으로 주요 위치에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맞은 사건이다. 영국은 도저히 잃을 수 없는 인도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남진해 오는 러시아와의 일전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국이 거문도 강점을 결정하기까지는 몇 가지 요인도 작용했다. 1885년 1월 28일 영국 외무부는 당시 러시아 주재 대사가 보내온 러시아 잡지 노보스티의 기사 번역문을 해군성에 전해준다. 기사에 의하면 러시아는 조선 남부 해안의 섬 중 하나를 점령할 계획이라고 했다. 아마도 쿠엘파트(Qualpart)섬(유럽에서 당시 제주도를 부르는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또 조선이 러시아와 기사 내용을 뒷받침하는 밀약을 맺었다는 일본 주재 영국대사관의 보고까지 전해졌다. 1884년부터 영국에서는 러시아의 야심을 경계하는 책이 수만 부씩 팔리며 러시아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러던 중 기름을 붓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1885년 3월 30일 아프가니스탄의 조그만 오아시스 마을 펜제 소유권을 둘러싸고 충돌이 벌어져 영국군이 강군으로 육성한 아프가니스탄 군대가 러시아군에 의해 전멸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 내 여론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당시 영국 정부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톤은 자신이 속한 자유당 당론이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여론에 밀려 러시아의 동방남진 정책을 견제하는 첫 단추를 거문도를 통해 끼울 것을 결정한다.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통한 간접적인 충돌이 일어난 지 2주 뒤이자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첫 조사한 지 정확하게 30년 뒤인 1885년 4월 14일 드디어 영국 해군 중국본부에 정부의 거문도 강점 명령이 하달되었다. 당시 일본 나가사키에 주둔하고 있던 윌리엄 다울 해군중장은 중국본부로부터 명령을 전달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가멤논, 메가수스, 파이어브랜드 3척의 전함을 거문도로 급파했다. 영국 해군은 4월 15일 하루 만에 거문도에 도착해 거문도를 점령하고 주둔해버렸다. 앞을 내다본 강대국다운 오랜 조사와 준비가 쌓여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영국은 거문도 점령 5일 뒤인 4월 20일에야 중국과 일본 정부에 거문도 점령 사실을 통보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당사자인 조선 조정에는 5월 20일에야 통보하는 식으로 조선을 무시했다. 영국은 1883년 11월 26일 조선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어서 1884년 4월 4일 영국 공사 해리 스미스 파키스(Harry Smith Parkes)가 주한 영국 총영사관을 열고 상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무시했다. 그것도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통보를 정식으로 했느냐는 문의를 받고서야 영국의 북경 대사관을 통해 조선 정부에 간접적으로 통보했는데, ‘예방 차원의 선점 점령(preventive, pre-emptive occupation)’이라는, 조선의 입장으로서는 해괴망측한 이유였다. 영국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을 예방코자 거문도를 잠시 거수(居守)한다’는 이유를 조선에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강점을 시작한 후 거문도 점령에 따른 협상도 당사자인 조선은 제쳐두고 중국을 통해 러시아와 진행했다.
 
이후 거의 2년간 거문도에 주둔한 영국 해군은 러시아 ‘전함(Man of War·영국 해군의 특이한 용어)’이 보이기 전까지는 영국 국기를 게양하지 말라는 정부의 지시를 그대로 실천한다. 자신들이 외국의 영토를 합당한 명분 없이 강점하고 있다는 인식과 함께 실효점령하고 있으니 굳이 당사자인 조선을 비롯해 러시아, 일본, 중국을 자극할 이유는 없다고 여긴 듯하다. 영국은 거문도 강점 기간 동안 자신들의 거문도 주둔이 ‘급박한 상황으로 인한 임시조치’임을 극구 강조했다. 영국은 조선에 1년에 5000파운드(현재가치 24만1550파운드·4억1000만원)를 조차대금으로 지불하겠다는 금전적인 조건도 내걸었다. 조선 정부는 중간 협상자인 중국이 이 조차대금을 받아들이기를 권했으나 거부했다. 러시아로부터의 반응도 고려했고 동시에 잘못하면 영원히 거문도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거문도에 도착한 영국 해군에 급했던 것은 우선 장병들이 묵을 막사였다. 거문도 주민 300명을 동원해 10여채의 막사, 병원, 창고, 통신시설 등의 건물을 지었다. 서울 영국영사관에서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영국 외교관이 해군을 도우러 왔다. 영국군은 자신들이 무력으로 강점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사와 병원을 짓기 위한 토지를 대여하면서 대가를 지불하려고 섬주민들과 협상에 들어갔다. 주민들로서는 영국군이 무력점령군임에도 불구하고 토지를 강제 징발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 사용료를 지불하겠다는 전대미문의 우호적인 조치를 취하자 감격했다. 영국군에 아주 협조적이었고 가격도 좋게 해주었다. 영국군은 섬주민들에게 자신들은 착취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며 사용하려는 토지에 대한 보상은 물론 본토의 탐관오리로부터도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는 10에이커(4만㎡·1만2000평)를 1년에 174달러(현재가치 4420달러·488만원)에 빌리기로 계약을 하고 사용했다. 거문도 주민으로서는 어차피 무주공산의 무인도였고 용도도 없던 땅이라 감지덕지했다. 급기야는 한발 더 나아가 영국군의 호의를 이용하기까지 했다. 영국군이 대포를 쏴서 고기가 다 도망가 버려서 손해가 막심하다며 배상을 청구해 받아낸 것이다. 영국군은 거문도 주민들이 요구한 금액이 너무 적자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이를 지불하고 말았다. 당시 영국 해군은 보고서에 ‘거문도 주민들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지 않는 사이에도 일본인들은 고기를 잡고 있음으로 미뤄 고기가 없어서 못 잡는 것이 아니라 게을러서 잡지 않는 것 같다’고 적었다. 알고서도 속아준 것이다.
 
사실 거문도 주민들에게 영국 해군은 구세주였다. 영국 해군이 들어 오던 4월은 거문도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가 춘궁기(春窮期)였다. 거의 굶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막사를 짓는 일을 해주면 그에 상응하는 임금을 지불하겠다고 했으니 거문도 주민으로서는 하늘에서 내린 은혜 같았다. 거문도 주민들은 처음에는 쌀과 함께 곡식을 임금으로 요구했으나 곡식이 충분해져서 쌀값이 떨어지자 현금을 요구했다. 그러자 영국 해군은 조선 동전을 구해와 지급했다. 영국 해군은 섬에서 조달할 수 없는 육류 공급을 위해 거의 모든 동물을 수입해 왔다. 소, 돼지. 양, 염소 심지어는 오리를 비롯한 가금류까지 들여와서 키웠다. 동물들은 예상보다 거문도 환경에 잘 적응해서 영국군의 식량조달에 큰 보탬이 됐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영국 해군의 물자조달이 부족해서 수송선이 동원되어야 했다. 자신들의 전함이 정박하고 있는 가까운 일본 나가사키로부터 물자를 들여오면 제일 쉬운데 일본은 영국의 요청을 거절했다. 러시아와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싶어한 이유도 있었지만 거문도가 조선의 영해 안에 있어 조선과 외교적 문제로 마찰을 일으키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과 관련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 있다. 거문도와 홍콩의 영국 해군 중국본부 사이의 1800km에 통신선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영국 해군은 거문도를 점령하자마자 거문도와 양자강 입구 상하이까지의 600km를 통신선으로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5월 28일 상하이와 거문도 간의 통신선이 설치됐고, 거문도와 홍콩과는 6월 2일에 연결됐다. 정말 대단한 속도였다. 조선에 전화가 들어 온 것은 이로부터 11년 뒤인 1896년 덕수궁과 인천 사이를 연결한 전화가 최초였다. 하긴 영국과 프랑스 간 43km 의 도버해협 해저에 전화선이 연결된 것이 1879년이니 그로부터 6년 뒤 거문도와 상하이를 통신선으로 연결한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기는 하나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정부는 영국 해군의 거문도 점령 보고를 받고 거문도 위치를 잘 몰라 인천 앞바다의 주문도로 여겼을 정도였는데 영국은 조선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조그만 섬 하나를 관리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을 아낌없이 투하한 셈이다.
 
어쨌든 거문도에 주둔한 영국 해군은 영국의 단호한 태도에 겁먹은 러시아가 별다른 위협을 일으키지 않자 별로 할 일이 없게 돼 버렸다. 영국 해군은 여가시간을 보낼 여흥거리를 찾게 되었고 그 바람에 거문도 주민들은 테니스, 당구 같은 색다른 색목문명(色目文明)과 함께 박래품(舶來品)의 신문물을 조선에서 처음으로 접하는 기회를 누렸다. 신기하고 맛있는 비스켓 같은 양과자(洋菓子)와 통조림 같은 각종 생필품은 물론 전기도 서울보다 2년 먼저 체험하게 되었다. 당시 영국군은 흐트러지기 쉬운 기강을 바로잡아 대민 문제가 없도록 장병 단속도 확실하게 했다. 당시 영국군의 주둔 상황을 직접 목격했던 생존 주민은 1962년 한 인터뷰에서 “영국군은 부녀자가 지나가면 뒤돌아 서고 우물물을 마시면 반드시 은화로 지불하고 갔다”고 칭찬했다. “어떤 수병이 술에 취해 주막 주모에게 키스를 했다가 부대에 잡혀가 바다에 수차례 던져지는 벌을 여러 번 받는 것을 보기도 했다”고도 했다. 사실 영국군은 섬 여인들의 얼굴 보기가 아주 어려웠다. 같은 조선인 외간남자들에게도 얼굴 비추길 꺼려 하는데 하물며 색목금발백면(色目金髮白面)의 서양 남자들은 당연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당시 한 영국 장교는 보고서에 ‘여인들은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토끼들이 도망가듯이 휙 뛰어가 버린다. 짧은 웃저고리와 발레리나 같은 긴치마를 걸친 예쁜 얼굴을 담 사이 구멍을 통해서라도 한번 슬쩍 보게 되는 일은 정말 행운이 있어야 가능할 수 있다’고 적을 정도였다.
 
영국군은 거문도에서도 무인도 섬에 주로 주둔해 주민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많이 없었다. 거기다가 영국군은 ‘엄격한 교류금지 규칙(strict non-intercourse system)’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직접적 교류로 인한 문제 발생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한다는 뜻과 함께 건강상의 문제도 고려한 조치였다. 당시 영국인의 입장에서 조선인의 건강이나 위생 상태는 바람직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영어의 ‘교류(intercourse)’라는 단어에는 성적 접촉도 담고 있기 때문에 당시 영국 장병들의 거문도 여인들과의 성적 접촉도 당연히 엄격하게 금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어떻게든 있게 마련인 주둔 군인과 현지 여인들과의 ‘관계’가 전혀 발생하지 않아 영국 장교도 상당히 신기해 했다는 기록도 있다.
 
주민들이 사는 섬에 어쩌다가 들어온 영국군이 거문도의 길거리 모습에 기겁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길거리에는 쓰레기가 널려 썩어가고 있었다고 기술돼 있다. 저녁이 되면 거의 모든 주민들이 술에 취해 있었는데 모두들 유쾌했고 영국인과의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모든 주민이 담배를 즐겼는데 심지어는 4~5살짜리 아이들도 끽연을 해 놀라웠다는 기록도 있다. 거문도 어린이들은 영국 군인들을 만나면 따라다니면서 겨우 한두 마디 하는 영어로 궐련을 요구했다. 주지 않고 가면 어디선가 배운 영어로 욕을 해댔다.
 
영국인은 조선인의 지적 수준에 상당히 놀라워했다. 낙도 주민이면서도 주변 국가와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전혀 무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들과 계속해서 접촉하던 몇 명은 금방 영어를 익혀 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게 될 정도였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군인들의 거문도 주민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은 ‘게으르고 더러워서 전함에 손님으로 부르고 싶지 않고 문화적인 소양은 전혀 없고 야만성만이 가득하다’였다. 주둔 장교의 한 보고서는 ‘만일 영국군이 장기적인 주둔을 계획한다면 모든 주민을 섬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권하기도 했다. 특히 콜레라와 천연두 문제는 심각해서 ‘그냥 같이 살 수가 없다’고 했다.
 
영국군은 거문도에서 철수하는 시점에도 계산에 밝은 영국인다운 발상을 한다. 자신들이 거문도에 세운 건물 인수자를 찾는 기상천외의 광고를 일본 나가사키와 중국 상하이 신문에 낸 것이다. 결국 인수자를 찾지 못해 옮길 수 있는 물건은 다 뜯어 배에 싣고 갔지만 벽돌 700여장과 통신 전선은 남겨놓고 갔다. 전선은 나중에 영국 통신회사가 인수해 상하이로 옮겨 갔으나 벽돌은 유감스럽게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애석해 했다. 정말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영국인이다.
 
영국은 거문도 점령을 계기로 러시아와 협상을 해서 향후 10년간 러시아가 더 이상 대한해협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고 철수를 결정한 듯하지만 사실은 해군 내부에서 거문도 주둔에 대한 비판이 주둔 초기부터 있었다. 거문도의 해군기지로서의 취약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막대한 유지비도 지적됐다. 그런 비판도 있고 하니 못 이기는 척 실리를 얻고 철수를 결정한 것이다. 영국은 정말 꿩 먹고 알 먹고 다한 셈이고 러시아는 주저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고만 셈이 되었다. 러시아는 영국의 거문도 강점을 자신들에 대한 강력한 결전 의지로 보고 대한해협에서의 활동이 위축되면서 남진정책에 제동이 걸렸다. 결국 1905년 9월 러일전쟁 패배로 향후 50년간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접게 됐다.
 
거문도는 영국만이 아니더라도 당시 열강 모두가 입맛을 다시던 곳이었다. 러시아도 1857년에 이미 거문도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인식해 석탄 수송항으로 이용하겠다는 핑계를 내세워 항구 사용 허락을 조선 정부로부터 받았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중단했다. 미국 해군성도 1884년 거문도에 해군 항구 설치 허가를 조선 정부로부터 받고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결단을 못하다가 결국 포기한다. 심지어는 일본도 2차 대전 패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1951년 열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당시 거문도를 자신의 영토로 할양해 달라고 요구하다가 거절당할 정도였다. 만일 그때 일본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면 우리 남해 중간에 일본 땅이 들어서는 정말 해괴망측한 일이 벌어질 뻔했다. 거문도는 우리는 그냥 별것 아닌 땅으로 치지만 지정학적으로 그만큼 중요한 곳이다.
 
현재 거문도에는 영국 군인 12구의 사체가 묻힌 무덤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이 영국군 무덤의 비석을 훼손해서 현재는 거문도 주둔 시 사망한 영국 해군 비석 두 개와 1903년 거문도를 지나던 영국 알비온 전함에서 사망한 해군 1명을 기린 나무 십자가만 남아 있다. 서울 주재 영국대사관은 매년 이곳을 성묘하고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나는 36년 전 당시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던 거문도 앞 백도를 가는 길에 이곳을 들른 적이 있다. 머나먼 이국 섬 구석진 곳에 묻힌 외국 젊은 병사들의 무덤이 왠지 보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 보았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는 내가 영국에 와서 살게 될 줄은 전혀 모르던 때였으니 보통 하는 말로 뭔가 씐 듯하다. 그래서인지 거문도사건은 내가 살고 있는 영국과 태어나고 자란 한국의 제대로 된 첫 조우였다는 이유 말고도 항상 마음에 남아 있다. 사실 거문도사건은 그냥 가볍게 넘어가면서 잊혀질 사건이 아니다. 열강의 다툼 속에서 살아 남아야 할 한국이 거문도사건에 배울 교훈이 상당히 많은 듯해서 하는 말이다. 조선조 518년 역사에서 외국 군대가 우리 땅을 강점한 병자호란, 임진왜란과 함께 거문도사건을 을유양란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망측한 생각도 한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유럽문화탐사(2015), 두터운유럽(2021)
영국인 발견(2010),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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