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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영국인들은 국가적 어려움에 닥치면 항상 의견을 구하는 인물이 서너 명 있다. 역사 속 인물로는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스가 대표적이다. 영국인들은 그들의 방대한 작품 속에서 현실에 대입할 수 있는 문구를 찾아 교훈으로 삼는다. 20세기의 인물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윈스턴 처칠과 마거릿 대처, 그리고 생존해 있는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영국인들이 위기 속에서 찾는 인물들이다.
   
이들 명총리 3인방을 서로 비교해 보는 일은 흥미롭다. 그러나 이 3인의 생애와 리더십을 ‘울지 않는 두견새’ 일화로 유명한 일본 전국시대(戦国時代)의 영걸(英傑) 3인과 비교해 보면 더 흥미롭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비교는 현재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우리로서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동소이해서 배울 점이 많기 때문이다.
   
‘울지 않는 두견새’ 일화란 일본 전국시대 영웅 3인이 두견새가 울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할지, 각기 다른 해법이 골자다. 오다 노부나가(1534~1582)는 “울지 않거든 목을 쳐라”라고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는 “울지 않거든 울려 보자”고 했다. 또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는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이 영걸 3인 중 오다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철의 여인’ 대처와 많이 닮았다. 강한 지도력의 소유자였던 대처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1981년 북아일랜드 독립 무장조직인 IRA 소속 수형수들이 60~70일간의 단식투쟁으로 10명이 굶어죽었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해 세계의 간청이 빗발쳐도 요지부동이었다.
   
반면 “울지 않거든 울려 보자”던 도요토미는 약관 41세에 18년 만의 노동당 집권을 가져온 블레어와 비슷하다. 블레어는 100년 역사의 영국 제1 야당 당수가 된 지 채 3년도 되지 않아 능수능란한 설득과 정치력으로 노동당을 천지개벽했다.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던 도쿠가와는 2차대전의 위기를 인내로 버텨낸 처칠과 닮았다. 처칠은 “나는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며 감언이설이 아니라 솔직함으로 국민들을 설득해 승리를 일궈냈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국민들에 의해 내쳐졌지만 은퇴하지 않았다. 그 후 6년도 넘게 평의원으로 있다가 77세에 다시 두 번째 총리가 되어 81세까지 봉직했다. 뚝심과 인내의 리더십은 도쿠가와와 판박이다.
   
  
기득권 깨부순 오다와 대처

   
이런 요지를 바탕으로 각각의 리더십을 다시 세세하게 되짚어보자. 오다와 대처를 비교하면 둘의 인생 역정과 정치철학은 너무나 비슷하다.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오다의 눈은 정말 경이롭다. 대부분의 다이묘들이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전파될 문명과 문화에 공포를 느끼고 문을 걸어 잠갔을 때 오다는 문을 활짝 열어 외국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다. 오다는 다른 다이묘 사무라이들이 새나 잡는 총이라고 무시하던 포르투갈산 조총을 누구보다 먼저 수용해 전투에 사용했다. 활과 칼로만 무장한 기마병 중심의 일본에서 조총으로 완벽하게 무장한 오다 군에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공개경쟁이 훨씬 이득이 높다고 판단해 당시 최고의 기득권이던 신사와 사찰로부터 상권을 빼앗아 자유경제시장인 ‘라쿠이치라쿠자(樂市樂座)’를 열어 경제를 일으켰다. 누구나 실력만 있으면 창업을 하고 가게를 열 수 있게 했다. 경쟁을 하니 물가는 싸지고 물자는 풍부해져 공장과 상인들이 몰렸고 결국 세금 수입이 늘어나 재정도 전과는 비교가 안 되게 튼튼해졌다. 당연히 기득권 세력이었던 신사와 사찰은 오다 정권을 위협할 정도로 엄청난 반발을 했다. 그러나 이미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오다는 부유한 상인들과 일반인들의 지지를 무기로 무자비하게 반발을 누르고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켰다.
   
대처도 영국 경제를 좀먹던 노조의 기득권을 법으로 제한해 영국병을 치유했다. 또 만년 적자였던 거대 국영기업을 민영화해 세수를 늘려 재정적자를 건전하게 했다. 민영화된 국영기업 종업원들을 사주제도에 편입해 주주로 만들었는데, 이런 노동자들이 거대기업 국영화에 앞장섰던 노동당을 떠나 보수당원이 됐다. 기득권을 제압하여 신민들의 지지를 받은 오다의 정책과 맥이 통한다.
   
오다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든 관습이든 비효율적이고 개혁을 가로막는 것은 과감하고 무자비하게 철폐했다. 경제력, 군사력을 직접 통제하에 두어 그전에 누구도 못한 천하통일의 대업을 결국 이루어냈다. 대처가 노동조합, 거대 국영기업 등을 개혁하면서 영국 경제를 살린 것과 같다.
   
대처는 자신의 정치철학 중 경제 면에서는 자유시장 원칙에 의한 공개경쟁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1986년 10월 27일 런던 금융시장에서는 천지개벽 같은 엄청난 개혁이 실행되었다. 주식시장 업자의 수수료 담합을 불법화하고, 외국인의 증권거래소 진입 금지, 증권거래 회사의 외국인 소유 금지를 푸는 조치가 도입됐다. 더 나아가 모든 금융 관련 회사들이 필요하면 예금, 대출은 물론 증권, 보험, 투자도 업종의 제한 없이 겸할 수 있게 했다. 덕분에 런던 금융시장은 단번에 세계 금융의 최고 중심지로 다시 뛰어올랐다.
   
   
   궁중 반란과 측근의 암살로 종말
   
이런 자유화는 의사, 변호사, 회계사 같은 각종 전문 직종에도 적용되었다. 각종 담합 행위와 기존 회원 이외의 신규 진입을 막으려는 업계의 폐쇄적 자율규제를 개혁한 것이다. 모든 자유 공개경쟁을 방해하는 법 규제도 정비했다. 대처의 이런 개혁은 결국 전통의 상권을 빼앗아 라쿠이치라쿠자를 연 오다의 정치철학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둘은 권력의 끝도 같았다. 오다는 워낙 독선적이고 독재적인 냉혈한이라 가신 중에도 내심 반감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많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주요 가신들이 독립영주처럼 행세했다. 그러나 오다는 가신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군사적인 면에서도 외부의 공격이 있으면 자신의 힘을 빌리게 만들었다. 철저하게 신상필벌을 시행해 가신들을 완전히 틀어잡았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지만 다른 다이묘처럼 중요한 시기에 가신들의 이탈이나 반란이 없게 만들었다. 독재를 하던 오다는 결국 믿던 최측근 부하의 반란으로 궁지에 몰리자 할복자살을 하고 만다.
   
대처도 1987년 세 번째의 압도적인 총선 승리를 하고 오만해진 나머지 인두세(人頭稅·poll tax)라는 악명으로 불리던 주민세(Community Charge)를 밀어붙이는 악수를 두었다. 거의 정치적 자살 행위였으나 대처가 공평한 과세라고 워낙 강하게 주장해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었다. 결국 여론은 보수당에 등을 돌렸고, 위기를 느낀 보수당 측근들에 의해 궁정 반란이 일어났다. 당내 하원의원 불신임 투표 전날 임기를 2년 남겨놓고 전격 사임한 대처는 철의 여인답지 않게 눈에 물기를 보이면서 총리 관저를 떠났다. 대처는 자신을 국민들이 직접 선출했다고 믿는 듯했다고 측근들이 증언했을 정도로 독불장군이었다. 결국 독선적이거나 독재를 하면 다른 사람이 아닌 믿던 측근에 의해 낙마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울지 않거든 울려 보자”고 했던 도요토미와 비슷한 블레어의 리더십은 재치 있고 세련된 언행을 바탕으로 한다. 또 둘 다 창조적이고 진취적이었다. 둘 다 밑바닥 흙수저 출신으로 순전히 자신의 노력만으로 당대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들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뒤 어머니가 재가하여 의붓아버지의 학대에 못 이겨 가출한 도요토미는 18세 때에 오다의 하인이 되어 화장실 청소와 주방 담당자 등을 거쳤다. 그러면서 출중한 능력을 보여 주군의 총애를 받았고 일찍 출세를 했다.
   
  
도요토미와 블레어의 실용주의
   
   
블레어는 거리 악사였던 할머니가 당시로는 금기이던 혼전 출산 끝에 아버지를 낳았다. 이후 아버지가 조선 노동자인 블레어에게 입양되면서 블레어라는 성이 정해졌다. 영국의 가장 하층계급인 조선 노동자 가정의 입양아였던 블레어의 아버지는 굴레를 벗어나려고 공부에 열중해 영국 최고 명문인 에든버러대학에 진학했다. 어렵게 학위를 따고 결국 법정 변호사가 되었고 호주 아델라이드대학교에서 법학교수로 강의까지 하는 신분 상승을 했다. 덕분에 두 아들도 모두 법정 변호사가 되었다. 블레어의 형은 고등법원 판사를 역임했고 블레어는 총리가 되었다. 철저한 신분사회인 영국에서 계급의 사다리를 뛰어오른 점도 도요토미와 같다.
   
도요토미는 과거 일본 사회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던 대도권(帯刀権)을 폐지해 사무라이 말고는 누구도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금지했다. 칼을 안 차면 벌거벗은 것 같다던 당시 일본인들은 거의 마른하늘에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대신 도요토미는 병농분리 정책을 펴서 농민은 농사에만 전념하게 해서 농산물을 대폭 증산하는 정책을 폈다. 덕분에 도요토미는 영토를 늘리지 않고도 대량 수확을 거두어 힘을 키웠다. 천하평정을 한 후에는 전국적인 토지조사와 상업통제, 사농공상 신분제 실행 등을 통해 사회 기강을 세웠다.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권을 수립해 전국을 완벽하게 자신의 손아귀에 틀어쥐었다. 잔혹한 무력만이 아니라 신민들을 잘살게 하여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지도력을 발휘한 것이다.
   
블레어도 노동당 당수가 되자마자 과거 노동당 전통의 정치 원칙과 사회주의로부터 당을 바꾸어 신노동당(New Labour)을 만들었다. 그 결과 국민들이 두 번이나 더 권력을 쥐여줬다. 물론 쉽게 이룬 것은 아니다. 당연히 기존 전통을 지키려는 수구원로(old guard)들이 난리를 쳤다. 불과 41세에 당수가 될 때부터 블레어는 이미 3선의 하원의원이었다. 11년의 웨스트민스터 경험과 함께 이미 그림자 내각에서 에너지, 고용,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중견 정치인이었다. 그런 경험과 친화력으로 동료의원들과 노조를 상대로 특유의 설득력을 발휘해 능수능란하게 개혁을 밀어붙였다. 블레어의 가장 큰 공은 노동당의 가장 큰 정치원칙이었던 당헌 4조 ‘거대 산업의 국유화’를 폐지한 일이었다. 혜안이 있던 과거의 당수들도 당헌 4조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감히 폐지를 시도하지 못했었다. 당헌 4조 폐지라는 성과는 중도보수 유권자까지 끌어들여 노동당 역사상 처음으로 3연승을 하게 만들었다. 블레어의 대의명분이 아닌 실용주의가 힘을 발휘한 셈이다.
   
도요토미도 블레어처럼 순발력과 순간적인 판단력이 뛰어났다.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 출세한 덕분인지 눈치도 빠르고 판단력도 정확했다. 해서 누가 내 편이고 누가 적인지를 잘 구별했고 설득력도 출중했다. 적의 동조자나 가신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 세력을 늘려나갔다. 도요토미는 영주들이 저항하면 철저히 처벌했고, 바로 복속하면 일부 영지를 몰수하고 나머지는 소유하게 했다. 먼저 협조하면 영주의 영지를 존중해 해가 가지 않도록 했다. 결국 세력이 약해진 주군 밑의 영주들이 휘하로 몰려들게 했다. 밑바닥에서 오래 걸려 출세한 도요토미의 능수능란한 실용의 처세술이 블레어처럼 빛을 발휘한 셈이다.
   
역대 노동당 총리 중 가장 오래 재임한 블레어도 도요토미와 같은 운명을 맞는다. 아무 소득이 없는 임진왜란을 7년에 걸쳐 벌이다 몰락하고 죽음까지 맞게 되는 도요토미처럼 블레어도 무리한 해외 출병으로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당내 반란으로 사임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블레어는 1998년과 2003년 코소보, 2000년의 시에라리온, 2001년 아프카니스탄 참전의 성공으로 자신을 정의의 사도로 과신한 나머지 2003년 이라크 참전을 무리하게 밀어붙였다. 블레어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한다는 근거가 불충분한 보고서로 의회의 참전 결정을 오도했다는 여론 악화로 임기 전 사임하고 말았다. 그러고도 상당히 오랫동안 이라크 참전 책임으로 법과 여론으로부터 괴로움을 받았다. 임진왜란 직후 사망한 도요토미처럼 블레어도 결국 정치적으로는 사망선고를 받고 말았다.
   
   
인내와 혜안의 리더, 도쿠가와와 처칠


   
소규모 영주였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적의 가문에 인질 신세가 되어 항상 목숨의 위협을 받던 도쿠가와는 처칠과 닮아 있다. 처칠은 할아버지가 처칠 가문 7대 공작이고 아버지는 재무부 장관을 지낸 영국 최고 명문 귀족 출신이다. 그러나 부모의 정과 보살핌을 못 받아 중·고등학교 시절 낙제도 하는 말썽꾸러기였다. 처칠은 자신을 키운 유모가 사망했을 때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돌봐준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잃었다고 무척 슬퍼했을 정도로 부모들은 관심 밖이었다. 어머니는 미국에서 시집와 자식 양육보다는 런던 사교계에 더 관심이 많아 집사와 유모에게 교육을 맡겼고, 공무로 바쁜 아버지는 머리가 둔해 보이는 처칠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중에 직업이 안정된 군인이나 하라며 아들을 사관학교로 밀어넣었다. 워낙 실력이 안된 처칠은 3수를 해서 겨우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처칠은 독서로 늦머리가 트였다. 인질이나 다름없는 생활 중에도 자신의 시간이 올 때까지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어려움을 견디면서 힘을 길러 결국 자신의 꿈을 성취한 도쿠가와와 그래서 비슷하다.
   
일본 전통상 세력이 약한 가문의 자식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주군의 인질로 가야 했다. 그래서 부모의 보살핌은커녕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눈치껏 삶을 살아야 했다. 도쿠가와는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영지를 오랫동안 물려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어린 나이에 이미 험난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다.
   
처칠은 부모의 손이 아닌 집사와 유모의 손에 크면서 세상을 배웠다. 그러면서도 서민들을 위하는 획기적인 정책을 뚝심으로 밀고 나갔다. 정치적 생명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이념과 당 정책이 맞지 않으면 서슴없이 당을 바꾸어 출마했다. 다행히 유권자들은 처칠을 내치지 않고 뽑아주어서 64년의 정치 역정 중 2년간을 빼고는 하원의원으로의 지위를 계속해서 누렸다. 뛰어난 정치인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정치생명을 잃는 모험도 해야 하는 법임을 처칠은 보여준다.
   
도쿠가와는 자신의 야심인 천하통일을 위해 군량미 등 군사력 강화를 위한 자금마련의 방안으로 면세를 받던 사찰의 세금을 징수하려고 했다. 승려들의 반발이 일었지만 간신히 가라앉히고 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화적인 화해를 한다. 심지어 신앙심이 깊어 불교 쪽에 서서 자신을 배신했던 가신들도 대부분 용서하고 만다. 이유는 그들 전원을 처벌하면 세력이 너무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인 타협을 한 셈이다. 그러나 정리가 된 다음에는 약속을 어기고, 사찰을 태우고 배신했던 가신들을 처벌하는 등의 보복을 해서 장래에 화근의 씨가 될 뿌리를 아예 잘라내 버렸다. 결국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던 지방 영주와 사찰들을 효과적으로 정리해 친권을 강화했다.
   
처칠은 쌍방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문제를 유연하게 중재하는 능력으로 유명했다. 정치 경력 초반부터 크게 갈등을 불러일으키던 노사쟁의 문제에 관여해 특별한 재능을 발휘했다. 자유당 정권의 골칫거리를 잘 해결해 정부 내에서 신임이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노사 당사자들에게 맡기기보다 주로 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문제를 해결하려던 자유당 정권은 처칠의 능력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처칠은 자신의 정치철학대로 탄광 노동자들이 하루에 8시간 이상 노동을 못 하게 하는 법과 그걸 어기는 고용주 처벌법도 만들었다. 또 식사시간과 최저임금법 같은 선진법을 주도하면서 과거 자신의 당 동료였던 보수당 의원을 시간을 두고 한 명 한 명 주도면밀하게 설득해나갔다. 결국 큰 표차로 법을 통과시키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처칠은 입법을 통해 실업 노동자들에게 직장을 구해주는 기관도 설치했고 실업보험도 창설했다. 또 노동자가 납부해야 할 보험료 중 일부를 국가가 부담하게 하는 법안도 주도했다. 이런 친서민적 법안들을 과거 보수당 동료 의원들의 협조를 받아 통과시켰다. 이런 식으로 자신은 기득권인 귀족 집안 출신이면서 노동자와 서민들을 위한 정책의 선도자로서 활약해 인기가 높았다.
   
1차대전이 끝난 후 처칠은 군수장관, 전쟁장관, 공군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전후 처리를 맡았다. 종전 평화협상에서 2차대전의 빌미를 만들고 만 독일에 과도한 배상을 요구하지 말자는 주장을 폈던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 그리고는 2차대전 후 급격하게 세력을 늘려가던 소련의 위험을 감지해 독일군을 완벽하게 해산하지 말자고도 주장했다. 소련의 위험을 감지해 세계에 경고한 ‘철의 장막’ 발언도 처칠의 날카로운 혜안에서 시작되었다. 히틀러가 1933년 집권을 하자마자 처칠은 나치의 위험도 감지한 바 있다. 당시 영국 정부가 전투기 생산 예산을 감축한 일을 경고했다. 그리고 당시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대인 차별과 군사력 강화, 나치독재 강화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기회 닿는 대로 경고하고 다녔다. 이런 혜안이 결국 처칠로 하여금 명총리가 되게 하는 밑거름이었다. 처칠은 전시 총리가 되어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을 구하는 큰 힘이 되었다.
   
이렇게 한 국가 리더는 이들 6인처럼 시대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해 미래에 나아갈 옳은 방향을 찾아내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유럽문화탐사(2015), 두터운유럽(2021)
영국인 발견(2010),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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