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물은 소리 내지 않고 흐른다,’ 대하무성의 의미입니다. 물은 사람의 됨됨이를 이르는 표현입니다. 사람을 설명할 때 사람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사물이나 자연을 예로 들어서 비유합니다. 비유로 말할 때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사람은 물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기원이 물에서 나왔다라고 진화론에서는 이야기 할 정도입니다. 생명체는 물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물이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생명을 살려내는데 필수 도구일 뿐이지 전능의 물질은 될 수 없습니다. 작은 물은 소리를 내지만 큰물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의 깊이와 넓이를 의미합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도 이에 상통하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는 물은 중요하게 다룹니다. 에덴동산은 네 개 강의 발원지입니다.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강입니다. 그 강은 흘러 흘러 요한계시록 까지 흘러갑니다. 바로 인간이 마셔야 할 생수의 강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그 생수의 근원은 물 자체가 아니라 바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예수님 자신을 일컬어 생명을 주는 생수로 표현하셨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물을 마셔야 합니다. 육체를 위한 물도 마셔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을 위한 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셔야 영혼이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은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물이 흘러가는 것은 곧 인간이 기록한 역사입니다. 신앙적으로 교훈이 되는 물은 요단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마른 땅 같이 건너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수3:14-17) 그 이후에 선지자 엘리야는 스승인 엘리야의 겉옷을 쳐서 요단강을 가르기도 했습니다.(왕하2:14) 수리아 군대장관인 나아만은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고 문둥병을 고침 받았습니다.(왕하5;13-17) 다른 나라의 중심 도시를 흐르는 강, 잉글랜드 중남부를 흘러 런던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336킬로의 템즈강, 프랑스 중북부의 776킬로를 흘러 파리 중심을 관통하는 쎄느강, 태백산맥에서 발원하여 강원도, 충청북도, 경기도 서울의 중심을 흐르는 514킬로의 한강 보다는 요단강은 도심을 가로 질러 흐르지 않고 팔레스타인 광야를 종단하여 결국에는 사해 바다로 귀속되게 됩니다. 요단강의 길이는 직선 길이가 130킬로, 굴곡을 측정하면 약 320킬로나 됩니다. 요단강의 발원지는 갈릴리 호수이며 그 호수는 레바논 북쪽에 위치한 만년 설산인 헬몬산에서 발원한 천연 생수입니다.
인간은 강에 기대어 살아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of Ephesus, B.C. 540 – 480)는 ‘흐르는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강물은 흐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깨끗한 천연수라 할지라도 그 물이 흘러가지 않으면 부패하게 됩니다. 또한 아무리 더러운 물일지라도 맑은 물이 계속적으로 공급되고 흐른다면 물은 살아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만년설인 헬몬에서 녹아내려서 갈릴리의 수원이 되었고, 그 물은 흘러 흘러 요단강을 이루며 사막과 광야에 생명을 공급해 줍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내 안에 흐르는 강물이 비록 작은 샛강이라 할지라도 그 강물을 통하여 살아나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강을 통하여 살아난다는 것은 거룩한 영향력입니다.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영향을 받고, 또한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생명 순환적인 삶입니다. 내 것을 다 내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법적으로는 내 것이지만 그 내 것에는 반드시 이웃의 몫이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이 강물을 흐르게 하여 살아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 가는 법칙입니다. 대하무성, 큰물은 소리를 내지 않고 흐릅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거룩한 도움을 베푸는 삶을 산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받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더 복된 것임을 베푸는 삶을 살아보게 되면 깨닫게 됩니다. 흐르는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지만 그 강물이 흘러가는 곳은 정화되고 새롭게 됩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은 어떻게 보면 틀릴 수 있습니다. 역사 이래 윗물이 맑아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속한 물이 윗물이기에 나부터 정화시켜 맑은 물을 흘러 보내야 합니다. 비록 내 안에 흐르는 강물이 지극히 작은 샛강이라 할지라도 그 강은 소리를 내지 않고 흘러 대하무성의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박심원 목사
예드림커뮤니티교회 공동담임
박심원 문학세계 http://seemwon.com
목사,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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