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 왕
찰스 2세는 합법적인 아이가 없었다. 1685년 그가 죽고 나자 그의 동생, 로마 카톨릭 교도로 태어난 제임스가 잉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의 제임스 2세 왕이 되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7세가 되었다. 제임스는 로마카톨릭을 옹호했고 카톨릭 교도들로 하여금 군대의 장교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은 국회법이 금지했던 것이었다. 그는 국회의 동의를 구하려 하지 않고 성공회 주교 몇몇을 체포하였다. 잉글랜드 사람들은 제임스가 한 번 더 잉글랜드를 카톨릭 국가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두 딸이 확고한 신교도이기 때문에 사람은 곧 다시 신교도가 군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임스의 왕비가 아들을 낳았다. 갑자기 다음 군주가 신교도가 아닐 것처럼 보였다.
명예혁명
제임스 2세의 큰 딸인 메리는 그녀의 사촌, 네덜란드의 신교도 통치자인 오랜지 윌리엄과 결혼하게 된다. 1688년 잉글랜드의 중요 신교도들이 윌리엄에게 잉글랜드를 침범하여 그 자신이 왕이 될 것을 선포하라고 요청하였다. 윌리엄이 잉글랜드에 도착했을 때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제임스는 프랑스로 도망가고 윌리엄은 왕좌를 차지해서 잉글랜드와 웨일즈 그리고 아일랜드의 윌리엄 3세가 되고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2세가 되었다. 윌리엄은 메리와 함께 통치하였다. 이 사건이 후에 ‘명예혁명’으로 불렸다. 왜냐하면 잉글랜드에서 전투가 없었고 의회의 권력을 인정했으며 군자가 자신이 원하는 데로 통치하려 하는 것을 종식시켰기 때문이었다.
왕위를 되찾기 원하는 제임스 2세는 프랑스 군대의 도움을 받아 아일랜드로 침략했다. 윌리엄은 1690년 아일랜드의 보인전투에서 제임스 2세를 패퇴시키고 이 전투는 오늘날에도 북아일랜드에서 기념되고 있다. 윌리엄은 아일랜드를 재탈환하고 제임스는 프랑스로 도망쳤다. 아일랜드 로마 카톨릭 교도들에게 많은 제약이 가해졌고 이들 아일랜드 카톨릭 교도들은 정부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에서도 제임스에 대한 지지가 있었다. 제임스의 지원을 받은 무장 반군들의 반란은 킬리크랭키에서 신속하게 제압되었다. 스코틀랜드 모든 부족들은 윌리엄을 왕으로 받아들이는 맹세를 해야만 했다. 글랜코의 맥도날드 가문은 이 맹세에 참여한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이 대학살의 기억이 일단의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새 정부를 믿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일단의 사람들, 특히 스코틀랜드에서는 여전히 제임스를 합법적 왕이라 믿었다. 어떤 사람들은 프랑스에 망명해있는 제임스와 합류했고 일단은 비밀리 그를 지원했다. 제임스 지지자들은 제코바이트(야곱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입헌군주제- 권리장전
윌리엄과 메리의 통치 시절 권리 선언이 있었다. 이것은 왕이 국회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올릴 수 없으며 판사를 임명할 수도 없다는 것을 확약한 것이었다.
군주와 의회와의 권력의 균형이 영구히 변화된 것이었다. 1689년 발표된 권리선언은 의회의 권리와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의회는 군주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제한할 수 있으며 왕이나 여왕은 신교도여야만 한다는 것을 선언했다. 새 의회의 의원들은 적어도 3년마다 선거로 선출되어야 했다. (후에 이것은 7년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5년이 의원 임기이다.)매년 군주는 의회에 육군과 해군 운영 기금을 요청해야만 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효과적 통치를 의미했다. 군주는 조언자나 장관들이 필요했으며 이들은 하원과 상원에서 투표의 과반수를 확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의회에는 두 개의 주요파벌이 있었는데 이들은 휘그파(Whigs-스코틀랜드어로 ‘모반자’ ‘말 도둑’을 의미)와토리파(Tories-아일랜드어로 불법 카톨릭교도를 의미) 였다. (현재도 보수당은 여전히 토리파로 불린다.) 이것이 정당 정치의 시초가 되었다. 이때는 또한 출판의 자유가 신장하는 데 중요한 시기였다. (신문과 다른 출판업자들은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1695년이후, 신문들은 정부의 허가 없이 발행이 허락되었다. 덕분에 많은 신문들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명예혁명 이후 통과된 법들은 이른바 입헌군주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군주는 매우 중요하지만 더 이상 국회가 동의하지 않는 한 특별한 정책이나 행동들을 취할 수 없었다. 윌리엄 3세 이후 점차 장관들이 군주보다 더 중요해졌지만, 이것은 현대 의미의 민주주의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국회의 구성원을 뽑는 투표권을 가진 국민의 숫자는 극소수였다. 단지 얼마 이상의 재산을 가진 남자들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 여자는 전혀 투표에 참여할 수 없었다.
어떤 선거구는 부유층 한 가문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러한 선거구들은‘포켓 바로우(주머니속의 읍 혹은 면)이라 불렸다. 다른 선거구들 가운데 유권자가 거의 없었고 이들 선거구는 ‘썩은 동네(바로우)’로 불렸다.
박필립 칼럼리스트(www.facebook.com/thamespark)
굿모닝런던 발행인
영국 안중근청년아카데미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