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이데올로기나 민족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지구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우리가 기꺼이 노예되기를 서슴치 않는다면, 그것은 국가나 민족을 향해서이다. 국가는 개인의 육체적 안위와 행복을 위해 노력하며, 민족은 개인의 정신적 안위와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 최소한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다.
여러가지 연유와 경로를 통해 팔레스타인을 벗어나 살게된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불렀다. 약 2700년 전 하나님 '진노의 지팡이'였던 앗시리아에 의해 약속을 어긴 이스라엘이 멸망하자 앗시리아에 편입된 조국을 떠나 많은 유대인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디아스포라는 우리 말로 '이산(離散)'이라고 번역될수 있다.
로마제국의 대도시였던 로마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등을 중심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에 동화되었지만 자신들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만은 지키며 살았다. 그들의 민족적 자주성과 경제적 능력에 의해, 유서깊은 반유대인의 풍조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넓은 의미의 가장 큰 디아스포라는 아프리카의 후예인 흑인들이라고 할수도 있다. 텃밭에서 김매다가 난데없이 쇠사슬을 차고 노예선을 타야했던 조상들에 의해 이역만리에서 흩어져 살게된게 그들이다. 그러나 흑인들을 디아스포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의 문화적 단일성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와 관점이 존재한다. 다망(E. Damman)이나 바시나(Vansina)처럼 아프리카의 문화적 단일성을 부정하는 시각이 있고, 탕펠(Tempels )처럼 문화적 단일성을 옹호하는 입장도 있다.
한민족으로 시각을 좁혀 디아스포라를 바라본다면 가장 회자될만한 이들은 재일한국인들이다. 나라를 빼앗긴 이후 갖가지 경로로 일본에 살게된 그들은 여러가지 정치적 사회적 차별 속에서 그 뿌리를 내려온 사람들이다. 재일한국인 서경식은 <디아스포라 기행> 이라는 책을 상재하며 '추방당한 자의 시선'이라는 부재를 붙인바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속의 붕어'라고 은유한다. 정체성 상실의 아픔이나 소수자의 아픔으로 대변되는 디아스포라의 슬픔을 누구보다 온몸으로 맞이한 인물로 보인다. 앞으로 있을 사회에 대한 희망이나 전망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소수자로서의 체념에 대해 그는 절망하고 있다.
재영 한국인들은 어떨까. 저마다 절절한 곡절과 사연을 안고 조국인 대한민국을 떠나 영국에 살게된 그들은 분명 디아스포라들이다. 영국 문화에 동화되어 살면서도 꿋꿋하게 한국인의 풍모와 체면을 잃지 않고 훌륭하게 버티고 있다. 같은 입장인 나는 그들을 늘 존경과 경의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편이다.
그들의 메카인 뉴몰든 하이스트릿을 걸을 때마다 가슴이 뜨뜻해진다.
한식당에서 새어나오는 된장 끓는 냄새가 구수하게 코끝을 자극하면,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붕어의 먹이를 생각하며 침이 고이기도 한다. 분란스러운 싸움을 정치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영국 한인회를 생각하면 한끼를 건너뛰고 싶을 정도로 밥맛을 상실하기도 한다. 책가방맨 아이들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한국 엄마들을 바라보면 내가 누군가를 어렴풋이 알것 같기도 하다.
절망만 있다면 너무 억울하다. 나에게도 희망은 있어야 한다. 디아스포라의 애타는 희망은 '크로스오버(Crossover)'에 있다. 한국과 영국이 만나고 교차하는 바로 그 지점을 위해 우리의 곡절과 사연이 존재한다. 우리는 한국에도 없고 영국에도 없는 인간들이 아니다. 우리는 영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는 인간들이다.
추방당한 자에게도 희망은 있을 것이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