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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가 있어야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우리가 현실의 벽을 설명하며 자주 쓰는 말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열심히 기술을 닦고 실력을 쌓아, 요즘 말로 커리어와 스팩을 많이 쌓으면 모든 일이 쉽게 풀려야만 하고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나 세상이란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농담 삼아 하는 말 중에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머리 좋은 이를 못 따라가고,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돈 많은 이에는 못 당하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재수 좋은 놈을 못 당한다’는 말이 있다. 옛 말에도 타고난 사주팔자(四柱八字)는 다 정해져 있는데 뜬 구름같이 왔다가는 인생은 공연히 바쁘기만 하다(年月日時皆有定 浮生空自忙)고 노래하고 있다. 올해 한 일에 대한 결산하는 추석이다. 모든 사람들이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기를 둥근달을 보며 기원해본다.



명절증후군

추석에 대한 생각도 시대흐름에 따라 많이도 변하는 것을 느낀다. 아침에 조상에 감사하는 차례상을 차리는 것부터 최근의 추석귀향을 피하기 위한 ‘가짜깁스’가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에 까지 논란도 많고 입장에 따라 할 말도 많은 것 같다. 오죽하면 의학적으로도 ‘명절증후군’이란 용어가 나왔을까. 내가 전문가가 아니니 단언해서 할 말은 없지만, 나는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을 한마디로 줄여서 표현할 수는 있다고 본다. 그게 바로 ‘건(件)’이다. 우리는 ‘건’이나 ‘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건(事件)’도 있을테고, ‘한 껀’도 있을테고, ‘껀수나 건수(件數)’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건’을 만들어 내느냐 못 만드느냐에 따라 인간 간의 상호관계가 지속되는냐 아니면 거기서 멈추느냐가 달려 있다고 본다. 어려서부터 살아가는 과정에는 숱하게 많은 이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대부분이 기억에 많이 남겨지지 않는다. 남아있는 이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반드시 거기엔 건수가 있다. 비록 몸은 만나지 못한다하더라도 기억 속에는 함께한 건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을뿐더러 수시로 튀어나오곤 하는 것이다.



비록 동기라도

한국은 대부분 16년 이상을 학교란 집단을 통하여 생활을 하며 지난다. 무려 6년을 한 반에서 같이 지내온 경우도 있다. 엄청 친해야하는 사이여야 하는데 사실은 서로 얼굴만 알고 아무것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건수를 제공해 주지 못하는 교육의 문제점 중 하나이거나, 무관심에 의한 특수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건수가 없었다고 밖에 볼 수가 없다. 명절에 잠간 만나듯이, 오랫동안 헤어져 살다가 우연히 객지에서 서로 마주쳤다하더라도 인사만 나누고 헤어질 것이 뻔하다. 만약 큼직한 껀수가 둘 사이에 있었다면 우연히 마주칠 일도 없겠지만 만난 순간 아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옛 시절로 돌아가서 바로 그 자리서 다시 한건을 도모할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나도 모교의 훌륭한 친구들 덕에 카페나 카톡을 통하여 동기들 소식을 매일 접하며, 내가 살아 온 인생이 참 슬프기도 하구나하는 생각도 한다. 진즉 알아서 친구들과 건수를 많이 만들었다면, 지금 동창들 모두하고 그 시절처럼 다 친하게 대하련만, 지금 친구들 모습이 그 시절 그 모습은 아니지만, 함께 한 건수의 추억이 선명치 못함에 내 스스로가 부끄럽고 친구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영화 ‘써니’

추석과 설날 등의 명절은 우리의 혈통문화라 말하고 싶다. 한 동네나 가까운 곳에 모여 살던 친인척들이 명절에 모두 모여 단합대회를 하며 한 건하는 날이다. 개별적으로 수시로 서로 자주 만나기도하며 서로가 서열과 질서를 알며 자기가 할일을 아는 가족들끼리 모두 한데모여 가문의 영광과 혈통을 위한 대동단결을 위한 자리다. 가문을 위해 당연히 건수가 존재했고 마련되었다. 음양론에 양(陽)은 양(陽)끼리 모이듯이, 여자는 여자끼리 모인다. 하지만 현대는 말만 가족이지 일 년에 한 두번 보기도 어려운 낯선 이들이 모여 새로운 서열과 질서를 세워야하고 잘 하지도 못하는 일도 해야 하는 부담감에다 서로 잘 모르니 청문회 버금가는 질문공세는 분명히 질병을 불러오는 일일 것이다. 돈과 권력 앞에는 서열도 무너지니 가족도 가족이 아닌 것 같은 세상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서로가 함께 나눌 건수를 서로 가지고 있었다면 아무리 더 큰일이 있다해도 떼어 놓지 못할 것이라 믿는다. 영화 ‘써니’라도 보며 이번 추석부터 가족 간의 건수부터 만들어 보자.


영국서울한의원 원장 박사 김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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