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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단상





지난 2월 5일 대사관 회의실에서 <한인 사회 화합 방안>이라는 주제로 모임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결의된 내용을  그 주 발행된 신문에 보도했을 때 신문이 나오고 얼마 있지 않아 재영한인총연합회의 전 부회장으로 그 모임에 참석했던 인사는 그 보도가 <사실을 왜곡해서 보도>한 것이라고 메일을 보내 항의했다. 항의 내용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되는 데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왜곡>했으며 <이는 책임 있는 언론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음 호에는 반드시 이러한 사실을 정정하여 독자로 하여금 혼란이 없도록 하여 주실 것을 부탁>한다고 했다.

또 다른 재영한인회 부회장 비대위 신분의 인사도 이런 항의에 동참했다. 그는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도 메일을 보내 <참 어찌 같은 모임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지 그것도 신문 기사내용에서…>라며 이는 <개탄스런 일>이라고 했다. 이런 항의성 메일을 받은 나도 실로 개탄스런 일이다. 어떻게 같은 모임에서 나온 결론을 말하는데 이렇게 다를 수가. 그 인사는 <그 미팅에 속기사가 '속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를 공개해서라도 반드시 시시비비를 가려 잘못되었으면 정정기사가 나와야 할 듯> 하다고 해결책까지 제시했다. 시시비비를 가리자니 정말 나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맘이었다.

사물을 보는 인식의 차이로 다른 말을 할 수는 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절반이 남아 있는 술병을 보고 비관적인 사람은 술이 반밖에 안남았다고 하고, 낙관적인 사람은 아직 술이 반병이나 남았다고 한다는 비유가 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엇갈린 평가가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술이 남은 상태를 긍정적으로 보느냐 비관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인식은 다를 수 있지만, 술이 반만 남은 상태는 사실이다. 인식과 상관없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언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언어의 진정성을 규정하기 어렵다고 한다. 언어에 대한 판단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경험한 삶이 다르고 현실을 인식하는 차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미의 혼란이 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언어의 의미가 혼란스러운 것이지 그 언어가 있고 없었음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저 사람이 한 말의 뜻은 이렇지 않을까'라는 개인적 추론은 다를 수 있지만 '저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회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보도했다. 사실을 왜곡하지 않았다. 그런데 26명의 참석자 중 한 사람은 왜곡 보도라고 했고 참석하지 않은 한 사람도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했다. 그러고 싶었다. 왜곡 보도라고 한 그 인사는 지난번 재영한인총연합회의 회계보고에관한 내용을 보도했을 때도 사실 왜곡이라며 소송을 걸겠다고 한 바 있다. 소송을 걸겠다거나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그들의 <전가의 보도>처럼 보인다.

그런데 명쾌한 해결이 났다. 오늘 전임회장단 명의의 선거공고가 나왔기 때문이다. 한인 사회에 소송으로 인한 피해가 오지 않도록 새 한인회와 새로운 차리티를 만든다는 내용의 선거공고다. 또한 <지난 2월 5일 대사관 회의실에서 한인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여 현 한인사회의 분열을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일치단결>해 해결책을 찾으며 그 방안을 <전임회장단에 전권을 위임>했다는 내용도 공표했다. 이를 보면 사실을 왜곡한 것이 누구인지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같이 보고 들었는데 왜 달라졌는지를 아니, 왜 다르게 주장해야 했는지를 오히려 묻고 싶다. 

사실을 왜곡하는 방법 중 가장 초보적이고 무지한 기법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기만이나 상대화 등의 방법은 그나마 문제의 심각성을 줄이려는 것이지만 부정은 아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단순한 기법이다. 있었던 사실을 막무가내로 부정하는 것. 가장 초보적이고 무지한 기법이다.

왜 그랬을까. 있었던 사실조차 왜곡해야 할 만큼 그들의 답답한 입장을 반증하는 것일까. 같은 회의, 다른 판단, 그들은 왜 왜곡해야 했을까.

헤럴드 김 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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