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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처절한 동질성의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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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와 고집들이 난립하게 되면서 이십 세기 미술은 휘청거리기 시작하였다. 휘청거림은 늘 현기증을 동반하는 것, 현대미술은 어지럼증을 극복하기 위한 치료제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인류는 미술 따위의 치료제를 생각할 만큼 한가하지도 마음씨 넉넉하지도 못하였으므로, 미술가들은 자신이 스스로 개발한 수제(手製) 치료제를 먹으며 현기증과 싸워야 하였다. 술과 마약이나 동성애 같은 엉터리 치료제를 복용하며 미술과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지러움 속에서 온전히 일어서 붓질을 하는 순간 이번에는 세상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세상에게 어지러움을 주는 미술의 특성을 ‘오리지널리티’라고 부르고 싶다. 예컨데 주정뱅이 잭슨 폴록이 더러운 세상을 향해 물감을 뿌려버렸을 때 세상은 그 신선한 오리지널리티 때문에 심한 어지럼증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동성애에 시달렸던(?) 영국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이 이 요상한 그림 “십자가에 못박힘에 관한 세 연구(1944, 테이트브리튼 소장)”(이하 ‘십못세’)를 발표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괴물이 등장하는 이 그림을 초현실주의라고 봐야 할지, 표현주의라고 봐야 할지, 입체주의라고 봐야 할지, 감 잡지 못하고 위태로운 인류는 그저 어지러웠을 뿐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철학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후손으로 알려진 아일랜드 출신의 화가다. 그는 인테리어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화가가 되었으며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인물이다. 어린 시절의 여성취 부터 비롯된 그의 동성애는 유명한 일화들을 전하고 있으며,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은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지면상 생략한다. 이 ‘십못세’는 그의 출세작이다. 전쟁의 막바지에 제작된 이 그림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무대, 지구에 대한 인류의 공감에서 비롯되어 여러 측면에 걸친 다양한 해석을 낳았으며 베이컨을 일약 떠오르는 스타화가로 등극시켜 주었다. 예술이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만족하도록 그 영토를 확장한 것은 과학의 발달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두 차례의 세계전쟁이 등 떠민 변화이기도 하였다. 과학과 더불어 발달한 무기의 흉포함과 잔인함은 예술의 가슴 깊은 곳에서 상처가 되어 남았던 것이다.

‘십못세’는 세폭화다. 제목이 주는 성스러움에 대한 베이컨의 허망한 상상력은 인간들을 당혹한 패닉 상태에 빠져들게 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지러움 속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이상한 형체의 괴물을 등장시킨 세가지 연구에 대해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그림의 시대와는 엄청난 변화를 획득한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내가 이 그림을 보면서 지른 비명은 너무도 다양하여, 나열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간단하게 몇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 불투명한 존재에 대한 비명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구원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전쟁이라는 게임을 통해 존재에 대한 회의를 타당화시켰다. 일그러진 자존감은 내면뿐만 아니라 외형까지도 뒤틀어버리는 무서운 공포의 다른 이름이다.

둘째, 과학 발달에 따른 대화단절의 비명이다. 고립된 자아와 가장된 자아를 함께 지녀야만 살아갈 수 있는 복잡한 현대인에게 존재하는 고독은 일그러진 형체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고독의 형태를 그려야 하는 임무는 그림쟁이들에게 새롭게 주어진 의무다.

셋째, 영화나 인쇄 등의 미디어가 노출시키는 파격적 이미지에 대한 예술의 비명이다. 베이컨에게 큰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진 ‘전함 포템킨(1925)’에서의 비명장면처럼, 영화 같은 뉴미디어의 파격적 장면들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탐구라는 화가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다. 공포는 내가 피한다고 해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공포와 싸우는 예술가들의 전의는 평화를 추구하는 십자군의 그것처럼 숭고한 것이다. 넷째, 비겁한 자신에 대한 성찰의 비명이다. 잘못된 세상의 모순을 알지만 구체적인 개선방향을 제시하기에 현대의 개개인들은 너무도 약한 존재일 뿐이다. 자학과 반성 이후의 스케줄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 현대인의 대책없음……

 

인간들은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렸다. 전쟁의 허망한 타당성을 위하여 희생되고 변절되면서 태초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환경 속에 놓이게 되었다. 스스로 괴물임을 인정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 슬픔 없이는 아무것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아픔을 이야기하고 공포를 노출시키는 것은 더 이상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징그러운 환부를 관찰해야만 치료가 가능하듯이 우리는 스스로 괴물임을 인정하고 함께 울고 웃어야 한다. 그 처절한 동질성의 발견을 우리에게 제시한 진지한 그림이 바로 ‘십못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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