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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 에세이

나는 런던의 택시운전사

hherald 2010.11.08 16:02 조회 수 : 10121

 

나는 런던의 택시운전사다.
그렇다고 런던의 상징인 블랙캡을 운전하는 것도 아니다. 택시운전의 마이너리그이자 서민들의 밥벌이 미니캡 운전사라는 이야기다.

 

제법 괜찮은 일이다. 한가한 이민교회 목사가 하기에는 정말 더 없이 좋은 부업이다. 일은 대개 하루에 한 번, 아무리 많아도 서너 번을 넘지 않는다. 한번도 일이 들어오지 않는 날도 적지 않다. 그래도 20년의 영국생활 어느 때보다 주머니가 두둑한 느낌이다. 물론 이민교회 목사들의 주머니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손님을 태우고 공항을 다녀오면 대학진학을 앞둔 아들놈의 1시간 과외비가 떨어진다. 덕분에 아들놈은 과외스케줄로 빡빡한 하프텀(학기중의 짧은방학)을 보내야 했다. 이제 더 이상 과외비가 부담스럽지 않다. 목회를 하느라고 소홀했던 아들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사실 좀 더 일찍 아이에게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운전을 하다보면 문득 홍세화의 책이 떠오른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였다’
빠리에서 호떡좌판을 벌일만한 종자돈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택시운전은 하지 않았을 것(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이라던 그는, 빠리를 누비며 택시운전을 하는 동안 삶을 통해 구체화된 ‘똘레랑스Tolerance’를 가슴에 담게 되었다. 미화하자면 (이미 제목이 시사하듯 미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택시운전이 홍세화의 철학 실습장이었던 셈이다.

 

홍세화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 유신말기 최대의 공안사건으로 기록된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로 망명했다. 소위 ‘인텔리겐쨔 Intelligentsia’로 불리던 그가 망명하기 이전부터 이미 볼테르(프랑스1694-1778)의 사상적 이해쯤은 지식으로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정작 운전 중의 대화와 논쟁들을 통해 똘레랑스가 존재하는 수준 있는 볼테르의 나라 프랑스를 체험하게 된다.

 

운전을 하면서 홍세화를 떠올리게 되는 이유가 단지 ‘그와 나를 동일시하려는 어떤 보상심리’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한 이유를 찾자면 운전을 하는 동안 ‘홍세화의 똘레랑스’를 생각하게 되는 상황을 자주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 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을 용의가 있다-볼테르”
똘레랑스에 관한 글이나 책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장이다. 프랑스인들에게서 그 사상적 영향이 몸에 배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 홍세화의 이야기다.

 

한국사람들처럼 토론과 대화에 서툴고 미숙한 민족도 없을 것이다.
나와 다른 견해를 용납하지 못하는 대화... 내가 반대하는 의견을 무조건 죽이려는 토론... 사실 우리가 자라면서 보고 배운 대화와 토론문화가 그랬다. 그것이 우리의 무의식과 태도에 그대로 녹아 든 것이다.

뽄때’가 없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본 데’가 없다는 말에서 유래된 평안도 사투리다 (국어사전참조). ‘본 데’가 없으니 말 그대로 ‘뽄때’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영국사람을 태우고 운전을 하다 보면 끊임없이 대화를 하게 된다. 서로의 생각이 다른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지 않도록 대화를 하는 것은 언제나 영국사람의 몫이다. 속된 말로 어떤 경우에도 대화의 ‘루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사람들은 거의 대화를 하지 않는다. 사실 운전을 하는 입장에서는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우리들의 ‘폰때’없는 서툰 대화는 마치 좁은 택시 안에서 시한폭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화는 꼭 언어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말이 오고 가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몸짓과 태도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보여주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이다.
똘레랑스는 나와 다른 지점에 서 있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다. 한강처럼 위 아래로 사람을 가르지 않고 쎄느강처럼 나와 다른 내 옆의 너를 바라보는 것이다.

 

어쩌다 사람을 남북으로 가르며 목사로 잘 못 살았던 나를, 런던의 택시운전사로 살아가면서 수없이 반성하고 또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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