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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 에세이

고부갈등

hherald 2010.09.13 14:53 조회 수 : 11791

 

아무리 시어머니가 좋아도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다. 에덴동산이 에덴동산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곳에 시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70에 혼자 되셨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며 그렇게 미워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허탈해하셨다. 나는 그 때 처음, 미운 정도 정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속 썩이는 옆지기가 죽어야 내 인생이 필 거라고 입버릇처럼 떠드는 여자들의 푸념을 믿지 않게 되었다.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가 영국으로 건너 오신 것은 2002년이었다.
다들 혼자되신 어머니를 아들이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도 십여 년을 떨어져 살았던 아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내가 있는 곳은 내 나라 밖이었다. 낯설고 물 설은 타국에서 정말 살 수 있으시겠느냐고 묻고 또 물어도 대답은 한 가지였다.
“다 사람 사는 곳인데...”

 

 

어머니가 영국에 오시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맘에 내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도 생각이 깊고 매사에 사려 깊은 분이시라, 모시고 살아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때 겨우 여덟 살 된 아들놈에게는 할머니가 영국에 오시는 것이 로또 당첨과 마찬가지였다.

 

 

 

이민목회는 담임목사가 아니라 ‘매일머슴’으로 살아야 한다. 물론 개척교회의 이야기다. 아이들 학교입학과 전학에서부터 교우들의 비자문제까지 해결해주어야 했던 당시에는 기러기엄마들의 뒤치다꺼리가 교회 일의 반이었다. 하다못해 한밤중에 전구까지 바꿔 끼워줘야 했고, 물이 빠지지 않는 하수도까지 달려가 뚫어줘야 했다. 그러다 보면 정작 아들놈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이집 저집 맡겨지기 일쑤였다.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늘 아이걱정을 했던 아내의 심정도 말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의 영국행을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항에서 만난 어머니는 비행기를 원 없이 타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12시간은 좀 길더라며 깔깔 웃으셨다. 어머니의 영국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이미 내 기억 속에 각인 되었던 내 어린 시절의 완벽한 어머니의 전형이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그토록 모순투성이의 논리와 고집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조금 서운하면 방문을 닫고 며칠씩 식사를 거르시기 일쑤였고, 당신의 뜻이 옳다는 것을 끝까지 고집하셨다.

 

하다못해 음식까지도 그랬다. 이미 내 입맛은 아내에게 길들여져 어머니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며느리의 음식을 더 맛있게 먹는 아들을 몹시 서운해 하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저런 일들로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들에게 어머니는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편을 들었다. 그렇게 6년이 흘렀다.

 

 

직장을 다니는 아내가 탈진했다. 직장이 힘들기 때문이 아니라 집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어머니가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불편한 시어머니의 존재감인 것이다. 힘든 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급격하게 가정이 균형을 잃기 시작했다.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배웠던 성경적인 결정은 옳든 그르든 아내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4
결혼으로 부모를 떠나야 하는 것은 여자가 아니다. 성경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야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다는 원리를 가르친다.

 

 

어머니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많이 서운해 하셨다. 그러나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궁지에 몰린 아들의 의견을 존중하셨다. 그 다음날, 어머니는 많이 우시며 어느 집에서 얻어오셨는지 뒷마당에 라일락을 심으시며 마음을 달래셨다. 별로 내키지 않는 볼품없는 나무였지만 뜻대로 하시도록 그냥 지켜봤다.

 

 

얼마 전에 뒷마당을 정리했다. 볼품없는 라일락을 베어버릴까 고민하는데...  그 나무에서 어머니의 마음과 향기가 느껴졌다. 몇 해 더 키워서 보기 좋은 자리를 잡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대로 뒀다. 죄송한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내도 괜찮은 사람이지만 어머니도 괜찮은 분이시다. 그런데 전혀 조화가 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것은 마치 좁은 공간에 현대가구와 고가구를 조화 있게 배치하려는 이상주의자의 정신 나간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과 삶의 오묘한 여건(?)에 따라 드라마틱하게 조화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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