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세상이 뒤바뀌어 역사가 이뤄지는 현장에 개인의 이해가 직접 걸려 있는 일은 흔하지 않다. 작년 말인 2021년 12월 26일은 ‘소련’이라 불리던 소련연방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해체된 지 30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영국 언론에도 소련의 해체가 주는 역사의 의미를 해석하는 기사가 많았다. 해당 분석 기사들은 최근 유럽 대륙에 다시 대규모 전쟁의 기운을 한창 드리우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국경의 대치 때문에도 더욱 시의성을 띠었다.
   
30년 전 소련이 해체되는 그 역사의 현장에서 필자는 무역업을 하고 있었다. 한국과 영국에서 생필품을 수입해서 판매하고 소련 제품을 한국에 팔기도 하는 중개무역 업체를 모스크바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의 모든 생산과 경제는 전지전능, 무소부재의 고스플란(Gosplan), 즉 국가계획위원회가 통제하고 있었는데 소련 공장들이 생산하는 물품은 무엇이든 일단 수량이 부족했다. 거기에 더해 품질은 물론 모든 것이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제품 디자인은 말할 것도 없고 포장도 선뜻 손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극히 제한적으로 들어오는 서구 자본주의 상업 제품에 당시 소련인들은 거의 환장할 정도로 목말라 있었다. 말보로 담배 한 보루(10달러)면 택시를 하루 종일 타고 다닐 수 있었고, 청바지와 스타킹이 모든 문을 열게 하는 요술방망이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정말 어떤 서방 물품도 소련에 갖고 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팔 수 있었다. 물론 팔아도 경화(硬貨·hard currency)라고 불리던 외화로 환전이 어려워 문제이긴 했지만 그래도 필자 같은 무역상들에게는 소련이 기회의 땅이었다. 당시 가격이 소련인들의 평균 임금(20~30달러)과 맞먹는 리바이스 청바지를 없어서 못 팔았으니 말이다. 환전의 기회만 있으면 판매 걱정이 전혀 없는 문자 그대로 엘도라도(El Dorado)였다.
   
   
   소련은 무역상의 엘도라도였다
   
당시 소련에서는 세계적 유행이 막 불기 시작하던 운동화도 인기 품목 중 하나였다. 당시 한국은 아디다스, 나이키 같은 유명 브랜드 운동화의 최대 생산 국가였다. 동대문시장 같은 데 가면 수출 공장에서 새어 나온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유명 운동화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원래 그런 제품들이 시중에 깔리면 안 되었지만 암암리에 팔리는 게 현실이었다. 공장들이 유명 상품을 생산할 때 불량이나 품질검사 탈락 숫자를 감안해 공식 주문량보다 더 많이 생산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생산 품질이 좋아 불량이 많이 없으면 공장들은 잔류량을 어떻게든 처분해야 했다. 이를 일러 해당업계에서는 ‘기술소득분’이라는 모호한 용어로 불렀다.
   
법에 따르면, 생산을 잘해서 남은 기술소득분은 태워서 없애거나 반드시 수출해야 했다. 그러나 해외 주문자 말고 다른 곳에 팔 수는 없었다. 이런 물건들은 동대문, 남대문 등 소위 구제품 가게로 일부가 흘러들어왔지만 그런 상점 몇 개로는 기술소득분 물량을 모두 소화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당시 상표권이 아직 등록돼 있지 않은 나라로의 수출만이 방법이었다. 동구권 국가 특히 3억 인구의 소련이 가장 큰 시장이었다. 이런 나라에 자신들의 상표가 붙은 비공식 제품이 팔려도 유명 상품 회사들은 어떻게 조치할 수가 없었다. 경쟁 때문에 무역회사로부터 생산가 이하로 주문을 받은 공장들은 이런 기술소득분의 뒷구멍 판매로 손실보전을 했는데 이는 업계의 공공연한 관행이었다. 이런 업계 관행을 유명 상표 한국 사무소나 관세청 등도 사실상 눈감아 주었다. 필자는 이런 물품들을 동대문시장 중개상을 통해 컨테이너로 수입해 소련 내에서 팔아 쏠쏠히 재미를 보았다.
   
소련 해체라는 역사적 대사태가 벌어지기 직전 필자가 운영하던 소련 회사는 소련 국립외환은행(Vnesheconom-bank·VEB)을 통해 컨테이너 두 개 분량의 운동화 수입신용장 50만달러를 한국 법인 지사를 통해 열었다. 당시 소련 은행에는 신용이라는 개념이 없던 때라 수입금액 전액을 담보금으로 은행에 예치하고 신용장을 개설해야 했다. 한국 지사는 VEB 신용장을 담보로 국내 은행에서 내국 신용장을 열어 운동화를 구매해 선적을 했다. 선적한 후 지사는 컨테이너를 실은 선박회사로부터 선하증권을 발급받아 추심서류를 은행에 제출했다. 이 서류를 한국의 은행으로부터 받은 신용장 추심 은행(영국에서 필자가 거래하던 바클레이은행 국제지점)은 모스크바의 VEB로 서류를 보냈다. VEB는 서류에 문제가 없으면 필자의 소련 회사가 예치한 담보금에서 빼서 바클레이은행에 지불하고 바클레이는 다시 한국에 있는 필자의 거래 은행에 지불하면 끝나게 되어 있었다.
   
   
   한국산 운동화 100만달러를 책임져라!
   
그런데 물품이 선적되고 한국의 은행을 통해 바클레이에 도착한 서류가 소련 VEB에 추심을 한 시점에 소련이 해체되는 거짓말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정말 단 일주일만 늦게 사태가 터졌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터였다. 소련이 해체되니 VEB는 당연히 업무가 정지되었다. VEB는 소련을 대표하는 국가 은행이었는데 국가가 해체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지불도 정지되었다.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공화국이 기능을 하기 전이니 아무런 조치가 있을 수 없었다.
   
필자의 지사에 대출을 해준 한국의 거래 은행은 난리가 났다. 결국 50만달러를 물어내야 할 판이었다. 결국 필자는 VEB에 묶여 있는 50만달러와 한국의 거래 은행에 물어내야 할 50만달러, 합계 100만달러를 감당해야 할 판이었다. 오지에서 혈혈단신으로 창업한 지 2년이 지나 막 자리를 잡으려는 판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셈이었다. 100만달러라는 금액은 당시 필자에게는 말로 다 못하는 거액이었다.
   
결국 목숨을 걸고 해결하지 않으면 알거지가 될 판이었다. 여기에 필자의 소련 파트너와 회사 직원 한 명이 구세주로 등장해 스릴 만점의 소설 같은 이야기가 벌어진다. 당시 KGB 출신의 파트너는 정관계는 물론 사회 각층에 발이 넓은 지방 공화국 그루지야(조지아) 출신이었다. 소련 공산당의 2대 조직인 청년동맹(콤소몰·Komsomol) 국제분과 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7개 국어에 능통한 거물이었다. 이 친구는 현역일 때 소련인이 해외로 나가는 3가지 루트 중 하나를 꽉 잡고 있었다. 소련에서 해외로 나가는 세 부류의 사람들은 외교관, 해외 상무대표부 요원, 공연이나 경기에 출전하는 예술인과 체육인 등이었다. 소련 체육인이나 연예인이 해외로 나갈 때는 콤소몰 국제분과를 거치지 않고는 나갈 수가 없었기에 결국 이 친구 손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친구 부인은 자기보다 더 키가 큰 뛰어난 미모의 볼쇼이 발레리나 출신이었다.
   
다른 구세주는 필자의 회사 직원이었다. 영어도 수준 이상이었고 일하는 능력이 뛰어난 데다 정직했다. 물론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직원도 소련 KGB에서 필자에게 붙인 요원이었다. 한국에서 온 첫 상사 주재원인 필자를 KGB는 당연히 정보요원으로 보았다. 당시 소련에 근무하던 특파원이나 상무대표부 직원들은 거의 다 정보요원이었으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소련 주재 1년 만에 열악한 환경에서 겁도 없이 개인 사업을 하겠다고 눌러앉았으니 뭔가 저의가 있다고 여겨 요원을 파견한 셈이다.
   
당시 이 직원과 파트너 둘 다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둘의 조건이 너무 차이가 났다. 직원은 총금액의 20%, 즉 10만달러를 해결사들이 요구한다고 했고, 파트너는 다른 것 필요 없이 TV 50대를 구해주면 된다고 했다. 당시 소련에서 인기 있는 삼성 TV 가격이 50달러이니 2500달러면 해결될 판이었다. 나라가 뒤집어지는 긴박한 상황에서는 너무 좋은 조건이어서 믿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형제 같은 파트너의 장담이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때는 10만달러를 주더라도 빠르고 확실한 해결이 급선무여서 결국 양쪽을 동시에 가동시켰는데 해결 과정은 거의 같았다. 파트너는 연줄이 있는 체육회를 동원했다. 파트너는 KGB에 합류하기 전 지금도 소련의 축구 명문인 디나모클럽의 선수 출신이었고, 디나모는 소련 시절 경찰과 KGB 소속 클럽이었다. 해서 파트너는 ‘한국산 운동화’는 은퇴 체육인을 돕는 기금과 관련되었으니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필자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구세주가 된 소련 사업 파트너
   
러시아 체육회가 러시아공화국 VEB에 민원을 넣고 러시아공화국 중앙은행을 거쳐 재무부로 민원이 제기돼 당시 러시아 총리인 옐친의 허락까지 받았다. 결국 서류가 다시 소련 VEB, 소련 중앙은행, 소련 재무부를 거쳐야 결론이 나는 지난한 경로였다. 그런데 진행 속도를 보니 필자의 파트너가 항상 한 단계 빨랐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파트너를 믿고 직원 쪽을 중단시키는 정말 일생일대의 모험을 했다. 파트너의 과거 실적과 실력을 믿기도 했지만 10만달러와 2500달러는 너무 큰 차이였기 때문이다.
   
모험은 대성공이었다. 결국 사태가 터진 지 채 두 달이 안 된 1992년 2월 중순 바클레이은행 국제지점에서 희소식의 전화가 걸려왔다. 50만달러가 입금되었고 그와 관련해서 국제지점장이 좀 봤으면 한다는 전화였다. 지점장은 필자 회사 계좌로 들어온 돈이 소련 해체 사태 이후 소련에서 들어온 첫 신용장 대금이었다면서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빨리 대금이 들어올 수 있었는지 설명을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바클레이은행은 소련으로부터의 미수금이 약 3억달러에 이른다고 했다. 필자가 “소련 파트너가 해결한 일이라 자세한 내용은 나도 모른다”고 하니 지점장은 “그 파트너를 우리 소련 지점과 연결 좀 해줄 수 있느냐”고 다급하게 부탁을 했다. 알아보겠다고 해놓고 파트너에게 말을 하니 “영국과는 말을 섞지 않겠다”고 했다. KGB 출신이라서 그런지 영국과는 얽히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파트너는 한국 종합상사 한 곳도 미수금 1억달러가 걸려 있는 걸 아는데 거기를 소개해주면 필자의 경우처럼 한 달 내에 해결해주고 총액의 20%인 2000만달러를 받아 반반 나누자고 했다. 개인적으로 친한 한국의 해당 종합상사 지사장에게 제안을 하니 그는 거절했다. 다른 한국 회사들도 다 걸려 있는데 혼자 괜히 해결하겠다고 나섰다가 잘못되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어려운 시기에 회사원으로서는 복지부동이 몸조심의 최선 방책이었겠지만 그래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필자로서는 팔자를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셈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20%의 커미션은 돈이 입금되는 시점에서 차감하고 지불되는 성공보수 형식이니 위험도 없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 무역상사들이 소련 해체 과정에서 못 받은 돈이 모두 얼마인지, 결국 어떻게 언제 해결을 보았는지는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찾을 수가 없다. 소련 파트너는 수출대금을 못 받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련 지방 공장들 몇 군데의 일을 해결해주고 결국 한몫을 챙겼다. 현재 그는 스페인 지중해 해변가에서 호텔을 경영하며 잘살고 있다. 정부 주머니 한쪽 돈을 다른 쪽 주머니로 옮겨주고 팔자를 고친 소련판 봉이 김선달인 셈이다. 소련 파트너는 이 건으로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고 소련 직원도 그 이후 오래되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 더 이상 필자가 한국 정보요원이 아님을 알아서 다른 곳으로 파견되었으리라 짐작했다.
   
   
 

   소련의 보너스가 전별금 될 뻔
   
당시 또 다른 사건은 보통 광목(廣木)이라고 불리는 소련산 목면포(木綿布) 수출에 얽힌 사연이다. 당시 필자는 소련산 목면포를 한국 장례식 상복용으로 수출했다. 원래 상복은 삼베로 짠 천으로 만들었지만 삼베가 워낙 비싸 원단 그대로의 노란 기운이 도는 목면포로 만든 상복이 서민용으로 사용됐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나는 목화를 러시아로 실어와 포목으로 짠 제품이어서 가격이 안성맞춤이었다. 소련에서 이런 생활 품목을 수출한 것은 한·소 무역 역사에서 필자가 처음이었다. 소련은 위성 공화국에서 생산된 원료로는 절대 완제품을 만들게 하지 않았다. 위성공화국은 원료만 생산하게 하고 제품 생산은 반드시 러시아공화국 내에서 했다. 혹시 위성 공화국이 독립하거나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대비하는 전략이었다. 이런 정책은 위성 공화국 청년들의 군복무에도 적용되었다. 현지 부대에 근무하게 하지 않고 반드시 다른 공화국으로 보내 타 민족과 섞여서 근무하게 했다. 한 민족으로만 부대를 형성하면 반란의 위험이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또 태어난 곳에서 근무할 경우 유사시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댈지도 모를 때를 대비한 조치였다.
   
이런 식으로 상당히 많은 목면포가 상복용으로 당시 소비 제품 수출입을 담당하던 라즈노엑스포트(Raznoexport)를 통해서 한국으로 수출되었다. 당시 필자 회사는 라즈노엑스포트로부터 신용을 쌓아 수출 후 한국 수입업체로 수금이 되면 대금을 지불하는 후불제라는 특혜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소련 해체 사태가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수출된 대금이 거래처로부터 막 입금된 시점이었다. 미지불금 5만달러는 당시로는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사태가 터지자 담당자 사무실로는 연락이 안 돼 저녁에 집으로 전화를 했다. 대금을 어디로 지불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담당자는 껄껄 웃으면서 “소련의 선물이니 나한테 밥이나 한 끼 사라”고 했다. 이렇게 두 사건에서 받은 대단한 행운은 진짜 소련으로부터의 보너스이자 전별금이 될 뻔했다. 하지만 다음에 소개하는 두 건으로 종국에는 손해보상이 되고 말았다.
   

 소련 논문 디지털화 프로젝트 아쉽게 무산

 

소련의 해체 과정에서 필자가 손해를 본 첫 번째 건은 소련 맥주 발티카(Baltika)와 관련된 일이었다. 발티카 맥주는 당시 최고의 소련산 맥주였다. 수입 맥주가 대거 들어오기 전까지 보드카와 함께 소련 주당들이 사랑하던 맥주였다. 유리병에 담긴 발티카 맥주는 다른 소비제품에 비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워낙 철저하게 유리병을 재활용해서인지 병 어깨 부분이 닳아 흠이 나 있어 보기 불편한 것 빼고는 문제가 없었다.
    
당시 필자는 거래로 알게 된 크라스노야르스크주 지방정부 주지사로부터 맥주 알루미늄캔 공장을 짓게 턴키 프로젝트(turnkey project)를 좀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턴키 프로젝트는 공장 건설부터 시작해 기술자가 와서 종업원을 가르쳐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게까지 하는 일관 건설을 말한다. 알아보니 한국의 두 회사가 알루미늄캔 공장을 지울 수 있는 기술과 인력,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공장 건설 총예산은 5000만달러였는데 필자는 성공보수로 공장 지분의 5%를 넘겨받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만일 발티카 맥주가 알루미늄캔에 담겨 시중에 깔렸으면 정말 소련 전국을 휩쓸어 대박을 칠 수 있었다. 그런데 소련 맥주공장 기술자들과 함께 한창 한국을 오가는 중에 소련 해체 사태가 터졌다. 결국 주지사는 갈리고 캔 공장 건설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역사에 ‘만일’은 없다지만 1년만 뒤에 소련이 해체되었으면 필자의 일생도 무척 달라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또 다른 손해 건은 한때 한국 컴퓨터 시장의 최강자였던 삼보컴퓨터와 얽힌 사연이다. 당시 트라이젬이라는 상표로 한국의 IT산업 태동기를 일군 삼보컴퓨터 이용태 회장은 필자의 고향 동네 어른이었다. 이 회장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 퇴계학회 참석차 처음 소련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소련의 가능성에 눈을 떠 필자와 함께 소련에서 컴퓨터 조립공장과 소련 전문 인력을 이용한 소프트웨어 개발을 시도했다. 특히 소련 국립 정보센터와 연계해 소련 내에 존재하는 각종 연구자료를 디지털 정보화해서 세계에 판매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소련 정부도 다 파악하지 못한다는 각종 연구소에는 세계가 탐을 내는 연구 논문과 기술이 수도 없이 숨어 있었다. 이를 한국이 주도해서 디지털 온라인화해 한국이 제일 먼저 혜택을 본 뒤 세계에 판매하자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물론 이 프로젝트 역시 소련 해체라는 사태에 휩쓸려 무산되고 말았다. 만일 이 프로젝트가 현실화했다면 한국 과학계나 기술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깝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유럽문화탐사(2015), 두터운유럽(2021)
영국인 발견(2010),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 런던 통신 - 소련 해체 그날, 한국인 무역상이 겪은 기막힌 일들 hherald 2022.02.14
2566 부동산 상식 - Extensions & Conversions 시 유용한 시간 및 비용 절약 방법 hherald 2022.02.14
2565 신앙칼럼- 내 존재의 대서사시 hherald 2022.02.14
2564 헬스벨- 스파이크 프로틴 그리고 미세 혈전 hherald 2022.02.07
2563 런던 통신- 코로나가 바꾼 결혼식 청첩장의 선물 리스트 hherald 2022.02.07
2562 이민칼럼- 영국 학위과정 종료와 졸업생비자 hherald 2022.02.07
2561 요가칼럼- 온몸의 유연성과 근력을 동시에!! file hherald 2022.02.07
2560 헬스벨- 뼈가 약해진다…칼슘은 다 어디로 가는가? hherald 2022.01.24
2559 부동산 상식- 겨울에도 가든 잔디 관리가 필요합니다. hherald 2022.01.24
2558 런던통신- 유럽 귀족들의 사치 뒤집어보기 hherald 2022.01.24
2557 요가 칼럼- 마침을 건강하게 시작하는 모닝루틴 10분 ! file hherald 2022.01.24
2556 런던 통신- 60년 전 음반이 1600만원! file hherald 2022.01.17
2555 요가칼럼- 꿀 잠 보장, 일주일에 한 번! 인(Yin) 요가 file hherald 2022.01.17
2554 부동산 상식- 2022년 런던 임대 시장 전망은? hherald 2022.01.17
2553 헬스벨- 식물성 식단 – 인간의 영양 요구를 맞출 수 있는가 hherald 2022.01.17
2552 헬스벨 - 무엇을 먹고 힘낼 것인가 hherald 2022.01.10
2551 요가칼럼 -매일 3분 이것만 하세요- 3kg 감량보장 file hherald 2022.01.10
2550 런던통신- 춤추고 폭죽 터뜨리고… 영국 장례식장서 벌어진 일들 hherald 2022.01.10
2549 신앙칼럼-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hherald 2022.01.10
2548 부동산 상식-2022: 부동산 열기는 계속될까? hherald 2022.01.10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