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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역사라는 엄청난 탑이 세워질 때 한 개인이 보태는 벽돌 한 장은 대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 하지만 때때로 조금 큰 벽돌을 얹는 경우도 있다. 필자는 가끔 1990년 한·소수교 과정에서 필자가 얹은 벽돌 한 장이 제법 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필자는 한국 여권을 가지고 정식으로 소련 상주를 한 최초의 한국 무역회사 지사장이었고, 소련 정부로부터 복수 비자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동시에 한국 본사를 대표해서 한국과 소련 사이에 최초의 합작기업을 설립하기도 했다. 필자에게 주어진 이런 수많은 ‘최초’라는 타이틀은 결국 소련이 꾀하고 있던 한·소수교라는 큰 퍼즐에서 파생된 결과였지만 자세히 보면 큰 그림의 시작이었다.
   
   한·소수교 전 소련 정부가 필자가 종사하던 세계 최대 모피회사 ㈜진도를 도운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모피 선진기술을 가진 진도의 소련 진출을 통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원피의 완제품 생산기술을 습득하고 좋은 모피제품을 소련인들에게 공급하고자 하는 경제적 이유가 있었다. 동시에 첫 번째 한·소 합작기업 설립을 계기로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차근차근 만들어 가려는 원려심모(遠慮深謀)의 일환이기도 했다. 한·소수교라는 금자탑에 필자가 얹은 첫 번째 벽돌이 바로 진도의 현지 합작법인 설립이었다.
   
   
   진도의 소련 현지 합작법인 설립
   
   당시 소련 정부는 자신의 전략 수출품인 모피를 대량으로 구매하던 진도를 소련으로 끌어들이려고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다. 한창 진행되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방정책)에 박차를 가하는 하나의 발판으로 진도모피는 안성맞춤이었다. 진도는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열리던 모피 경매시장에서 밍크, 폭스를 비롯해 소련산 원피를 대량으로 구매하던 제일 큰손이었다. 1년에 수차례 열리는 레닌그라드 모피 경매는 스칸디나비아, 미국 시장과 함께 세계 3대 원피 시장이었는데 진도는 레닌그라드 경매에 출품된 모피의 60%까지 사들인 적도 있었다. 진도가 모피 구매를 하지 않으면 경매 가격이 떨어질 정도여서 레닌그라드 경매회사는 진도의 구매 계획에 아주 지대한 관심을 갖고 경매 전 은밀하게 구매 수량과 품목을 알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진도로서는 경매회사 측의 의도를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 양측은 포커게임처럼 서로 치열한 눈치싸움을 했다. 경매회사는 진도가 해당 경매에 구매 의사가 없더라도 직원과 구매대행 에이전트의 출석을 간절히 요청할 정도로 진도의 영향력은 컸다.
   
   이런 대단한 구매력을 가진 진도의 소련 진출은 소련으로서는 아주 매혹적인 일이었다. 동시에 진도는 세계 최대 모피제품 시장의 심장부에 합작기업을 설립해 생산기지를 만드는 것이 해볼 만한 도전이었다. 소련은 진도가 소련에 직접 투자해서 자신들의 개방정책을 더욱 진행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당시 한창 떠오르던 세계경제의 ‘잠룡’인 한국과의 수교를 위한 첫 포석으로도 진도가 최적이었다. 그래서 소련은 진도의 지사 설립과 한·소 합작법인 설립을 농무성과 모피 판매 독점 전문기관 소유즈푸시니나를 통해 지원, 독려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필자도 아주 좋은 환경에서 최초의 소련 주재 상사원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당시 진도 구매대행 에이전트는 영국 런던 소재 유대인 회사였다. 이 유대인 사장은 모피업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베테랑이었다. 그는 항상 눈에 잘 띄는 붉은색 점퍼를 입고 경매에 참가해 호가(呼價)를 했는데 진도의 대행인인 자신의 존재를 과시해 낙찰가격을 유리하게 만들려는 전략의 하나였다. 세계 모피업계 최대 구매자를 대표하고 있으니 감히 끼어들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성 세(勢) 과시이기도 했다.
   
   
   소련과 통화되던 유일한 서방국가 영국
   
   당시 진도의 영국 법인장을 맡고 있던 필자는 거대한 역사의 파편을 우연하게 맞아 소련과의 인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 소련으로부터의 모피 구매는 뉴욕지사 담당이었다. 당시 뉴욕지사장은 소련 방문비자 받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던 미국 여권 소지자였다. 그러나 모피 구매 규모가 커지면서 뉴욕법인장이 맡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소련과의 통화가 문제였다. 당시 소련과 전화가 유일하게 되는 곳이 영국이었다. 소련의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인해 서방국가들은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을 보이콧했고, 그에 대한 맞대응으로 소련은 서방과의 직통전화를 모두 차단했다. 하지만 런던 금속 경매시장 등을 비롯해 각종 소련 원자재 판매를 이유로 런던과의 전화는 숨구멍처럼 남겨 놓았다. 런던에서 소련으로는 전화가 바로 연결되었지만 소련에서 런던으로 전화를 걸려면 전화국에 신청하고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이런 소통이 생명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구매 업무가 한 건 두 건 런던지사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진도의 소련 진출 교두보는 런던지사가 되어버렸고 필자도 어쩔 수 없이 소련 업무의 직접 당사자가 되었다.
   
   런던법인과 소련지사를 동시에 맡아 소련과 영국을 오가던 필자는 1987년 전적으로 소련 업무만 맡게 되어 모스크바에 주재하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소련과의 합작법인 설립에 매진하였고 결국 진도는 한국과 소련 사이의 최초 합작법인인 ‘진도 루스’를 1989년 설립했다. 당시 합작법인 계약서 서명식이 모스크바 붉은광장 앞의 유서 깊은 메트로폴호텔에서 열렸는데 소련 농무성 장관을 비롯해 관련 고위 공무원이 대거 참석했다. 서명식은 한국 9시 뉴스에 생방송으로 내보내기 위해 모스크바 시각으로 1989년 3월 1일 오후 4시에 이루어졌다. 최초의 한·소 합작기업 설립은 당시로는 대단한 뉴스였다. 미수교국이고 남북 대치 상황에서 사회주의국가의 종주국이자 수괴인 소련의 심장부에서 드디어 한·소 합작기업이 탄생한다는 뉴스는 정말 핫했다. 드디어 철의 장막에 한국을 향한 조그만 균열이 보인다는 식의 뉴스를 한국 언론은 보도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현장에서 생중계를 한 앵커는 현재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인 박영선 MBC 기자였다. 당시 29살의 박 기자는 한·소 최초의 합작기업 뉴스를 현장에서 생방송으로 특종 보도했다.
   
   
   박영선 MBC 기자의 특종 보도
   
   박영선 기자의 방소(訪蘇) 취재에도 필자가 일익을 담당했다. 당시 새로 발견한 ‘신대륙’ 소련에 대한 한국 내의 관심은 대단했다. 기업인은 물론 정치인이나 언론사 기자들은 방소 기회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 소련 비자를 받으려면 소련 기관의 초청장은 물론 당국의 허가가 있어야 했다. 박영선 기자는 거의 1년간 방소 기회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선을 찾고 있었으나 제대로 된 선을 못 찾아 상당한 금액과 노력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필자는 본사의 지시로 런던 주재 무역대표부 대표에게 부탁해서 박 기자의 소련 비자 문제를 2주 만에 해결해 주었다.
   
   이런 식으로 소련에 대한 뉴스가 계속 언론에 등장하자 한국 시청자와 독자들은 이제 더 이상 소련이 머리에 뿔이 난 공산당 사람들이 사는 먼 곳이 아니라는 현실감을 갖게 되었다. 또 한·소 최초의 합작회사 모피제품 제조공장이 1990년 11월 준공돼 본격 가동에 들어간 후 한국 기계와 기술로 제품을 만들어 소련인에게 팔고 있다는 사실도 한국에 소개되었다. 거기에 더해 진도는 모스크바의 가장 중심 도로인 고르키가에 위치한 인투어리스트호텔에 정식 매장도 개설해 외국 관광객은 물론 소련인에게까지 모피제품을 판매했다. 한·소 간의 직교역보다 한 단계 더 나간 합작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이 모스크바에서 팔리는 ‘사건’이 벌어진 셈이다. 1884년 수호통상조약으로 교류가 시작된 한국과 러시아는 1905년 일본에 의해 외교관계가 끊어졌는데 결국 85년 만인 1990년 9월 30일 다시 외교관계가 수립된다. 이 외교관계 재수립을 위한 벽돌들이 이렇게 해서 하나둘씩 쌓여 갔다.
   
   두 번째 벽돌은 당시 야당인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방소에 필자가 일조한 것이었다. 당시 현장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한·소수교 첫 물꼬를 김영삼 총재가 텄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대선에 실패해 의기소침해 있던 김 총재는 소련 방문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려 정치적 입지 전환의 계기로 삼고 싶어 했다. 김 총재의 방소를 당시 통일민주당 국제위원장이던 부산 출신 정재문 전 국회의원이 만들어냈다. 정재문 의원의 후일담에 의하면 김 총재의 방소 거사는 소련 외교잡지 노보예브레먀(New Times)의 기자가 정 의원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소련이 한·소수교의 주도권을 외교잡지를 통해 잡기 시작한 셈이다.
   
   

 

   
   김 총재의 1차 방소 사전 정지 작업을 하러 1989년 5월 정 의원과 김 총재의 허용상 비서가 소련에 왔다. 허 비서는 실세였다. 소통령이라 불렸던 김영삼 총재의 아들 김현철씨의 고등학교 선배로, 미국 유학 중 김 총재를 도와달라는 김현철씨의 부탁으로 귀국해 김 총재를 돕고 있었다. 정 의원과 허 비서를 위한 각종 편의를 당시 유일한 한국 무역회사 지사였던 진도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정 의원과 관련한 인상 깊은 일이 하나 있었다. 공식적인 만남이 아닌 사석에서의 일이다. 나중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대변인이 된 소련 정부 외교정책 잡지 노보예브레먀의 편집장인 비탈리 이그나텐코 부부와 정 의원의 저녁 식사 자리에 필자가 참석하게 되었다. 모스크바 최고급 호텔 메주드나로드나야의 소련 유일 일본 식당에서 만났으니, 식사비는 당연히 비쌌다. 필자는 당시 관행대로 식사비를 지불할 준비를 하고 갔다. 식사 후 웨이터가 청구서를 들고 오기에 신용카드로 내려고 하자 정 의원은 “내가 권 부장을 부른 이유는 앞으로 권 부장이 소련 생활을 할 때 이런 거물을 알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해서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감사 표시로 초청한 것이지 식사비를 내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나는 돈 많습니다. 내 돈 들여 총재님을 모십니다”라고 했다. 아주 인상적인 말이었다. 오랜 해외생활에서 수많은 정치인과 많은 만남을 가졌지만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정 의원은 나중에 소련 최고회의 의장, 외무부 장관, 총리까지 지낸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의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와 이그나텐코의 도움으로 김영삼 총재의 1989년 6월 방소를 이뤄냈다. 사실 프리마코프와 이그나텐코는 고르바초프의 사상적 오른팔, 왼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실세였다. 정 의원으로서는 제대로 된 선을 잡은 셈이었다. 소련 외교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 관변 연구소와 잡지를 통해 외교의 첫발을 디딘 것이다. 소련은 정부나 여당 차원이 아닌 야당을 이용해 북한을 비롯한 소련의 전통 우방을 자극하지 않고 서서히 수교 분위기를 외곽으로부터 만들어갔다. 정 의원의 이런 공로를 소련이 인정해서 정 의원은 한·러수교 1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푸틴으로부터 나중에 훈장도 받았다.
   
   김 총재의 방소는 아직 대사관이 없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야당 총재 신분이어서 결국 필자를 위시한 진도 소련지사 요원들이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나중에 대통령까지 오른 김 총재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한 일은 개인적으로도 영광이었다.
   
   야당 지도자들의 방소에 얽힌 얘기가 하나 더 있다. 당시 또 다른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역시 소련 동방학연구소를 통해 소련 방문을 추진했었다. 동방학연구소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위에서 든 두 기관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거기다가 중심 역할을 한 인사가 소련 동포였기에 한계가 있었다. 물론 소련 측이 교묘하게 정재문 의원에게 먼저 접근해 김영삼 총재의 방소를 만들어냈는데 소련 측이 김영삼 총재의 다음 대통령 당선을 예단해서 김 총재부터 초청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소련 정보력의 뛰어남을 증명한 일이다.
   
   
   스파르탁 축구팀 스폰서의 힘
   
   세 번째 벽돌 이야기를 해보자. 당시 소련 최고 스파르탁 축구팀 스폰서를 진도모피가 담당했었다. 소련은 프로스포츠팀이 존재하지 않아 모든 스포츠팀은 각종 기관 소속이었다. 당시 소련 축구의 1·2위를 다투던 디나모는 KGB(국가보안위원회), CSKA는 소련군, 로코모티브는 철도청 소속인 식이었다. 진도가 지원하던 스파르탁은 노동조합 소속이었다. 스파르탁은 권력기관 소속인 디나모나 CSKA와는 달리 노동자 클럽이어서 일반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당시 진도가 소련에 진출할 때 회사 고문을 맡았던 독일 귀족 출신 변호사는 “소련에서 사업을 하려면 3개의 권력기구 중 하나를 끼고 있어야 한다. 바로 공산당, KGB, 군대”라고 조언했는데, 권력기관을 끼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스포츠팀 후원이었다. 진도는 협상을 거쳐 노동조합 소속의 스파르탁을 후원하게 되었다. 상업회사에는 각종 공장과 회사들이 소속된 노동조합이 권력기관보다는 여러 가지 면에서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축구에 대한 소련인들의 열정은 정말 놀라웠다. 영하 20도에도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는 살을 에는 한파에도 불구하고 경기 내내 자리를 뜨지 않고 열광하면서 응원에 열중했다. 진도는 15만달러를 주고 1년간 스파르탁 선수들의 가슴에 회사 이름을 달고 뛰게 했다. 소련에서는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해외 스포츠팀을 공식 후원하는 것은 거의 초기 단계에 불과했다. 해외 프로스포츠팀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었다. 한국인들의 해외 축구 관련 지식은 겨우 독일에서 뛰는 차범근 선수에 관한 뉴스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본사에 거액의 스폰서를 하자고 설득하느라 무진 애를 먹었으나 확신을 가지고 노력해서 결국 이루어냈다. 실제 이 거금 15만달러는 두고두고 값진 돈이 되었다. 나중에 진도가 모스크바 여기저기에 상점 문을 열었을 때 스파르탁 후원이 힘을 발휘해 진도 상품의 성가가 높아졌다. 소위 말하는 브랜드 이미지를 확실하게 심어준 것이다. 소련인들로서는 서방 축구경기 중계에서나 보던 상업광고를 처음 대한 셈이다.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 선수들의 가슴에 붙은 이름의 효과는 사실 엄청났다. 지금도 스파르탁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당시도 대단했다. 그래서 스파르탁 이름을 대면 열리지 않는 문이 없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간단한 예로 운전 중 뭔가 잘못해 교통경찰에 걸려도 면허증 대신 진도 지사장 명함을 보여주면 그냥 보내주었다. 심지어는 명함에 사인까지 해달라는 경찰도 있었다. 지방에 출장가서도 일정이 일찍 끝나 모스크바로 돌아오려 할 때 항상 만석인 항공기 자리를 구하는 데도 진도 이름은 도깨비방망이였다. 심지어는 필자와 친해져서 경기 입장권이나 선수 사인이 들어간 티셔츠를 얻으려는 욕심에 조종석 옆에 앉혀 주는 과도한 친절과 만용을 부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예약이 너무나 어려운 정부 레스토랑도 문을 지키는 웨이터에게 명함만 보여주면 요술같이 문이 열리곤 했다.
   
   당시 소련 최고의 축구팀 선수들 가슴에 새겨진 진도 이름을 소련 사람들은 어떤 회사인지 궁금해했다. 소련인의 인식 속에 한국 회사가 새겨지기 시작한 첫 계기였다. 이렇게 한국과 친숙해진 스파르탁 팀은 한·소 스포츠 교류의 선봉장이 되었다. 한·소 축구 교류의 시작은 스파르탁 팀의 한국 국가대표팀과의 내한 경기였다. 1989년 2월 26일 내한한 스파르탁 축구팀은 3월 1일 부산에서, 3월 4일 서울 동대문종합운동장에서 경기를 펼쳐 1승1무를 기록했다. 한국 대표팀의 방소 답방 시합은 1989년 8월에 있었다. 스파르탁 팀과 루즈니키경기장에서 시합을 벌여 2 대 2로 비겼다. 이렇게 물꼬가 터진 후 스파르탁은 자주 한국을 찾았다. 1990년에 다시 방한하여 5월 17일 수원, 19일 전주에서 각각 시합을 했다.
   
   축구라는 스포츠를 통해 양국 국민의 뇌리에 적으로 새겨져 있던 상대방이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소련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영웅인 스파르탁 선수들을 통해 한국의 이미지가 확실히 개선되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적으로 있던 두 국가 간의 수교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서히 국민들 마음 속에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위에서 필자가 겪은 모든 일들은 1989년과 1990년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것이 1990년 9월 30일 한·소수교에 미세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유럽문화탐사(2015)
번역: 영국인 발견(2010),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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